새벽안개.
새벽안개가 자욱하다.
다랑이 논이 켠켠이 쌓인 야트막한 골짜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이 밀려든다.
기분이 상쾌하다.
지난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방울만한 은행들이 달린 은행나무가지가 축축 늘어졌다.
지난주 2차 교대기처리를 마친 검은콩(귀족서리태)밭에는 보랏빛 꽃들로 넘실댄다.
지난 집중호우 때 무너져 내린 토사를 걷어 올려주는 배수로정비작업부터 실시했다.
주변이웃보다 파종시기를 3주량 앞당겨 노지 직파해서 시험재배중인 검은콩은 조기파종 따른
웃자람으로 제대로 된 콩농사가 가능할까하는 의구심에 늘 관심의대상이지만 지금까지 작황은
기대이상이다.
두 번의 순지르기와 교대기처리과정으로 활발한 분지발생이 이루어졌고 가지마다 꽃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일까?
뿌리 깊은 구습에 대한 집착일까?
두 번의 순지르기과정을 치루는 동안 주변이웃들로부터"멀쩡한 콩 순을 잘라내서 콩 농사 다 망쳤다"는 애정 짙은 비아냥거림을 감내해야했다.
짙게 우겨진 녹음을 사이로 햇볕이 쏟아져 내릴 무렵 밭두렁 건너 이웃 밭엔 더위를 피해 김매기에
나선 이웃할머니가 콩밭에서 잡초와 싸움중이다.
봄배추 수확을 마치고 적기에 모종을 이식한 검은콩 밭엔 잎사귀가 무성하다.
순지르기의 장점을 설명하고 나서 순지르기할 것을 권유했다.
시원하게 예초기로 순지르기를 해 주면 좋으련만 몇 가지에서 순을 따주는 척하다 이내 포기하고 만다.
덮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숨이 턱턱 막힌다.
모두들 어렵다고 난리다.
기름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물가는 덩달아 춤을 춘다.
토요일 오후 여름휴가를 얻어 가족들과 함께 다락골로 이동했다.
다락골이라는 멍에에 얽매여 지난 3년 동안 계속해서 여름 휴가 땐 다락골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주말농사의 한계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뒤쳐진 일들은 계속 쌓이고 주로 이 기간을 이용해서
정리했었다.
미뤄진 일들을 해치우려는 욕심과 휴가다운 휴가를 만끽하고자하는 주장사이에서 사소한
충돌이 자주 발생했다.
최대한 가족을 배려하는 쪽으로 마음을 무장했지만 막상 다락골에 도착하면 먼저 호미부터
찾아들고 밭두렁을 넘어서는 자신이 퍽이나 우습다.
사람이나 작물이나 장마와 폭염에 지친기색들이 역역하다.
어깨를 축 느려진 야콘,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 넓적한 잎사귀를 오므리고 울금, 모진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고추까지 한결같이 나름대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서로 어울려 살아가려는
모습들이 힘겨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조붓한 시골길옆으로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해버린 고추밭들이 자주 눈에 띈다.
첫물 홍고추수확의 재미에 빠져있을 고추밭엔 이상하리만큼 인적이 드물다.
쉼터도착과 동시에 고춧대를 낫으로 잘라내고 있는 이웃 밭으로 달려갔다.
탄저병이 순식간에 퍼져 성한 풋고추 하나 없이 황폐화 되어 버렸다.
고추 500그루를 심어 붉은 고추 하나 구경도 못했다며 망연자실한 모습들이다.
70평생 직업으로 삼았던 농사를 지금 밭에 심어진 것들만 수확하고 집어치우겠단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절머리가 난단다.
지난해에는 초가을 궂은 날씨로 고추를 말리지 못해 다 썩혀버렸고 올해는 탄저병 때문에
성한 고추 하나 따 보지 못했다며 여름내 검게 그을린 얼굴엔 수심만 가득했다.
지난주부터 탄저병증세가 나타나 약제를 살포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단다.
장마철 과도한 요소비료 시비가 화를 자초했다며 70세노인 두 분이서 하는 일이 힘에
겨워 모든 것을 약제에만 의존하다보니 흙이 죽어 병만 키웠다며 때 늦은 후회만 늘어놓는다.
고추밭 바로 옆에 수박과 참외를 심었는데 장맛비로 수박 몇 개가 부패되더니 그 균들이 걷잡을 수
없게 고추에 옮겨 붙었다며 고개를 떨구고 멍하니 땅만 바라다본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주에 들렸을 때 이웃한 밭에 탄저병증세가 나타나 예방차원에서 방제를 해놓은 덕택에
다행히 밭두렁 넘어 우리 밭엔 전염된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청고병 증상을 보이는 한 그루만 빼고 멀쩡한 것 같았던 고추밭에 50그루 심은 아삭이
고추가 죄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부화가 끓어오른다.
언제부턴가 다락골에선 바이러스에 감염된 고추들을 "단풍 든 고추"라고 불러댔다.
"단풍 든 고추"
고춧잎이 희끗희끗하다 누렇게 변해간다.
줄기에 약간의 충격만 가도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나무줄기가 갈색으로 변해가며 쉽게 힘없이 부러진다.
꽃도 잘 달리지 않는다.
달린 고추들마저도 잘 크지 않고 한결같이 꾸부정하고 볼썽사나운 모습들이다.
풋고추의 과피에선 갈색반점들이 줄줄이 발견되고 흰 실선들도 나타난다.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작게는 일주일 많게는 3주를 농장을 비워둬야 한다.
대충 막아 놓은 물꼬는 터지기 십상이다.
대충대충 꿰매 입은 옷가지는 얼마못가 터질 것이다.
무모하리만큼 과감한 선택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늘에 앉아 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쉽게 마르지 않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덩그러니 원두막에 홀로 앉아 세상의 시름을 털어내고
한참을 내려다보는 고즈넉한 시골풍경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어머니 품속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