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아! 부탁해, 쨍한 햇살을......
여름아! 부탁해, 쨍한 햇살을......
장마가 끝자락입니다.
올 장마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치적치적 시작부터 끝까지 비가 내렸습니다.
능소화가 소담스레 핀 다락골엔
밭뙈기 한가운데서 없던 샘이 터지고 개울이 되어 흐릅니다.
어딜 가도 어디에 있어도
마음은 늘 다락골에 와 있었습니다.
마수걸이를 기다리는 장사치보다 더 가슴 조렸습니다.
몸뚱이 하나로 이리저리 마음만 급히 옮깁니다.
결코 하늘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비굴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에 감사할 줄 알고, 때를 기다릴 줄 알며
땀 냄새가 싫지 않으니 농사꾼으로서 기본은 갖춘 것 같습니다.
두주 전에 풀을 메
잡초가 별로 없을 줄로만 알았더니
웬걸, 밭뙈기엔 온통 풀 천지입니다.
삼백초와 도라지가 숨을 헐떡이며 잡초 사이에서 기를 쓰고 있습니다.
잡초는 습하면 습한 데로 가물면 가문 데로 잘 적응하는데 사람 손을 걸친 작물은 그렇지 못합니다.
작물이건 자식이건 키우는 덴 사랑만이 다는 아닌가봅니다.
때론 배고픔과 외로움, 모자람의 경험도 보태져야 할 것 같습니다.
장맛비와 숨바꼭질은 계속됩니다.
호밋자루를 챙겨들고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으면 비가 퍼붓고,
비를 피해 그늘막에 걸터앉으면 비는 그칩니다.
마지막까지 장맛비가 까탈을 부립니다.
아주 심는 시기를 놓친 들깨모종이 웃자랐습니다.
계속된 장맛비로 키만 자랐습니다.
조심스레 모판에서 뽑아낸 모종을 키 높이에 맞춰 가지런하게 추려 넉넉하게 간격을 띄워 한구멍에 세 개씩 옮겨 심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농사의 기본.
농사를 일구며 세삼 깨달은 지혜입니다.
다 끌어안고 키우겠다고 욕심냈다간 전체가 흐지부지 될 수 있습니다.
곁가지와 곁 이삭을 잘 제거해주어야 실하고 여문 결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될 성 싶은 가지를 선택해서 역량을 집중시킵니다.
실한 옥수수통을 하나만 남기고 곁 이삭을 몽땅 제거합니다.
꽃망울로 갈 양분을 뿌리에 집중시키기 위해 잘라낸 도라지 꽃망울로
효소를 담급니다.
작물을 재배하는 행위 자체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인지 모릅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경작을 하면서 자연에게만 내맡기는 농사가 과연 가능할까?
가끔 의심이 듭니다.
봄에 심어놓고 싹이 나오질 않아 생사가 궁금했던 생강 싹이 제법 올라왔습니다.
이맘때쯤 웃거름을 주면 쑥쑥 잘 자랍니다.
농사를 시작할 때부터
호기심 반 관심 반으로 재배했던 야콘을 대신에 올핸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거름도 필요치 않고 병충해도 강할뿐더러 봄에 심어 놓기만 하면 가을까지 손이 가지 않아 거저 얻어지는 작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남들이 짓는 농사를 지켜보면서 얻은 착각이었습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고라니가 잎과 줄기를 송두리째 뜯어먹더니 급기야 뿌리까지 파해집니다.
급한 마음에 둥근마 줄기를 유인하기위해 쓰다 남은 오이그물을 꺼내 밭두렁에 쇠말뚝을 박고 촘촘히 엮어 맵니다.
까만 땅콩이 샛노란 꽃을 피웠습니다.
땅콩꼬투리가 달리는 자방병이 땅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돕기 위해 두둑에 씌웠던 멀칭비닐 칼로 도려냅니다.
한순간 자연 앞에선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한 점 티끌에 불과한 인간입니다.
강낭콩을 수확하는 이웃집 할머니 얼굴색이 어둡습니다.
계속된 장맛비로 꼬투리가 여물지 못해 쭉정이 뿐이랍니다.
떠올랐던 지난해 여름의 아픈 기억들을 애써 지우며 검게 그을린 얼굴에 환하게 웃는 미소를 떠올립니다.
여름아! 부탁해,
쨍한 햇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