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진 생명들의 긴 침묵이 창밖으로 무겁게 스칩니다.
김장철도 막바지인데…….
임자를 찾아가지 못하고
선 채 얼어 썩어가는 배추들이 밭뙈기마다 수두룩합니다.
팍팍한 농촌의 현실이 안쓰럽고 먹먹합니다.
소슬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보이질 않습니다.
겨울을 실감합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되는지?"
"뭘 빼먹고 있지는 않는지?"


한 주라도 건너뛸 때마다 항상 뒤따랐던 까닭 모를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다락골에 오고 말았습니다.

 

"안 갈 거지?"
"예, 날씨도 추운데 거기 가서 뭘 하려고요.
이제 그만 집착에서 벗어날 때도 됐잖아요.
포기할 것은 그만 포기하세요."

 

돌아올 대답을 빤히 알면서도 같이 가 줄 것을 내심 기대했는데
찬 날씨만큼 매서운 핀잔으로 돌아옵니다.
지난주에 수확하여 처마 밑에 건조중인 울금에게 발목을 잡혔습니다.
수은주가 뚝 떨어진다는 예보인데
건조중인 울금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난처한 일을 그만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깊은 산중에 혼자 고립된 것처럼 느껴지는 정적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마음까지 꽁꽁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좋아하는 사진 찍는 일조차 팽개치고
웬 종일 외딴집 방구석에 쳐 박혀 울금 알뿌리만 칼로 썰고 있습니다.
다음농사에 종근으로 쓸 것들은 넉넉하게 남기고 나머지 알뿌리는 일일이 조각내 깨끗하게 씻습니다.
얇게 슬라이스 썰기를 한 후 방바닥에 깔아놓은 흰 종이 위에 서로 겹쳐지지 않게 하나하나 펼쳐 말립니다.
만만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은근히 짜증나고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인내심을 시험하려듭니다.

 


항상 꿈을 꾸며 살아왔습니다.
버릴 것은 다 버린 겨울나무처럼
내안에 채워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기운으로 채우고 싶습니다.
오감으로 즐기는 찰나적인 기쁨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슴속에 더 많은 것을 채우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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