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열매가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
 
빨갛게 익은 보리수, 누가 보리똥이라 하는가?
 
 
 
고추밭 고랑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며칠 한눈을 파는 사이 몰라보게 자랐다. 지금부터가 잡초와의 싸움에서 고비이다. 장마철에 나 몰라라 하면 풀한테 손을 들고 만다.

나는 풀한테 지는 한이 있더라도 밭에 제초제는 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그런데 비가 오면 땅이 질어서 풀을 못 매고, 한낮은 뜨거워서 못 매고. 요즘은 풀이 너무 자랐다. 자칫 작년처럼 풀밭이 될까 내심 걱정이다.

"보리수 맛이 별로인데요"

호미를 들고 한 고랑을 긁는데도 땀이 흥건하다. 벌써 꾀가 난다. 평상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동네 꼬마들이 그네를 타러왔다. 작년에 그네를 사다놓았는데 이웃집 애들이 심심하면 놀러온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가 동생과 함께 낯선 애까지 데리고 왔다. 처음 보는 애는 서울 사는 친척이라고 한다. 낯선 아이가 보리수나무 열매를 보고 내게 묻는다.

▲ 우리집 보리수나무. 엄청 많은 열매가 달렸다.
ⓒ 전갑남
"아저씨, 이 열매가 뭐예요?"
"이거 몰라! 보리수야."
"보리수요? 이거 먹는 거죠?"
"그럼."
"따먹어도 돼요?"
"그래, 따먹어."


서울 애가 보리수 몇 개를 입에 넣는다. 보리수를 먹어본 적이 있는 이웃집 애는 입을 가리고 웃는다. 맛을 아는 모양이다. 동생도 언니 눈치만 살살 살핀다. 씨를 뱉어내는 얼굴이 영 아니다.

▲ 보리수열매. 꽃보다 아름다웠다.
ⓒ 전갑남
"맛이 어때?"
"별로예요."
"나는 맛있던데."
"떫고 시어요."


아이의 얼굴이 떨떠름한 표정이다. 내가 시범이라도 보이듯이 몇 개를 따서 입에 넣었다. 하나도 떫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아이들이 입을 쏙 내밀며 웃음보를 터트린다.

"빨갛게 익은 걸로 따려는데 도와줄까?"
"뭐하시게요. 이걸 다 잡수시려고요?"
"응, 쓸 데가 있어서."
"잘 익은 걸로 골라 따면 되지요."


애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순식간에 보리수를 딴다. 자기들 키만한 작은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열매를 따는 게 신나는 모양이다.

요즘 아이들이 보리수 맛을 좋아할 리가 없다. 열매가 예쁘기는 하지만 보리수는 별로라는 것이다. 보리수 말고 얼마나 맛있는 과일이 있는가? 앵두는 떫은맛이 없어 그래도 맛있다.

꽃보다 열매가 아름다운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 꽃은 볼품이 없다. 앵두꽃에 비하면 화려하지가 않다. 크기도 작은데다 꽃 색깔이 약간 누리끼리하다. 꽃이 진 자리에 달린 열매도 처음에는 그다지 예쁘지 않다.

▲ 보리수나무 꽃
ⓒ 전갑남
꽃과 처음 달린 열매에서 예쁜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막판에 보여주기라도 하듯 가지 틈새에 다닥다닥 열매가 달렸다. 검붉은 자태를 뽐낸 보리수가 꽃보다 아름답다. 꽃보다 열매가 아름다운 나무가 어디 흔한가?

내 어릴 적, 고향집에는 보리수나무가 없었다. 앵두나무는 있었는데, 아랫집에 있는 큰 보리수나무가 무척 부러웠다. 이맘때쯤 울타리 밖으로 가지가 휜 보리수를 따먹으며 아저씨께 야단맞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남의 것을 따먹는 데는 마음을 졸일 수밖에.

예전 보리수를 보리밥 혹은 보리똥이라 불렀다. 보리밥이 쌀밥만 못하니까, 맛이 별로라서 보리밥이라고 했을까? 염소똥 같다고 해서 보리똥이라고 했을까? 어찌됐건 보리수는 먼저 익은 것을 본 친구가 임자였다.

그 땐 떫은맛은 차치하고 달짝지근한 맛에 혀가 빨갛도록 따먹었다. 요즘 아이들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경우와 딴판이었다.

보리수나무만큼 빨리 자라는 나무도 없는 듯싶다. 우리 집 보리수도 심은 지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에 조금 열리다가 올해 엄청 달린 것이다.

여느 나무에 비해 병해충에도 끄떡없다. 대부분 유실수는 어린 이파리가 자라고, 꽃이 필 무렵 진딧물에 녹아난다. 제대로 관리를 하려면 약제를 살포해야 한다. 우리 집에도 살구, 자두, 배, 사과나무 등 유실수가 있지만 병해충 때문에 모양새 있는 과일을 먹기 힘들다.

그런데 보리수는 농약 한번 치지 않았는데도 예쁜 열매를 맺어주었으니 너무 고맙다. 어린 나무에서 많은 열매가 달리는 것을 보고 참 잘 심었다는 생각이 든다.

보리수 술을 담그다

▲ 보리수열매
ⓒ 전갑남
아이들과 함께 딴 보리수가 수월찮다. 보리수 열매는 달리 보관할 방법이 없다. 술을 담가먹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한 꼭지 한 꼭지 열매를 다듬었다. 아내는 바쁜 일 놔두고 별일을 다 한다는 표정이다.

"당신, 술 담그려고 하지?"
"색깔이 예쁠 거 같지 않아?"
"맛이 떫을 거니 설탕을 좀 넣어요."
"그럼 좋겠네."


▲ 보리수로 담근 술이다.
ⓒ 전갑남
아내가 일러준 대로 설탕을 적당히 넣고, 30도 짜리 과일주를 부었다. 맑은 소주에 비치는 빨간 열매가 보기에 좋다. 아마 한 달 가량 지나면 열매에서 우러나온 색깔도 예쁘지 않을까 싶다.

"보리수 술이 어디에 좋대요?"
"정장 작용과 설사에 좋다고 하더군. 기침약으로도 쓰이고…."


환절기 때마다 기침이 심한 자기가 가끔 한 잔씩 먹으면 좋겠다며 금세 태도가 변한다. 아직 나무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설탕만으로 발효시킬 거라고 하니까 그때는 자기도 거들어준단다. 보리수는 발효성이 강하여 설탕에 재워두면 좋은 음료가 된다고 한다.

예전에 먹었던 보리수 맛은 그대로이다. 그런데 요즘은 애들한테도 괄시를 받는다. 예쁜 열매를 따지 않아 땅에 나뒹구는 것을 봐도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 꽃보다 열매가 아름다운 보리수. 빛깔만큼이나 고운 술맛을 기대해 본다.
출처 : 전원희망(田園希望)
글쓴이 : 산정 山頂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