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전통 가양주의 밑바탕은 ‘곡식’이다.
탁주든지 청주든지, 혹은 소주이든 간에 멥쌀과 찹쌀, 그리고 밀(누룩)의 조합이 빚어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너른 평야를 가진 지역일수록 술의 전통 또한 그 유래가 깊다. 음식의 명성만큼이나 술 또한 전라도산産이 특히 이름난 까닭이 이 때문일 터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논에 볍씨 한 말을 뿌려 60말을 거둘 수 있는 곳이
제일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는데, 경상도의 성주·진주와 함께 전라도에서는 남원과 구례를 꼽았다.
남원 땅은 전라도 동부 산악지대를 흐르는 섬진강의 한 지류인 요천을 거느린 터전으로, 섬진강
수계 중에서 구례와 함께 들이 가장 넓은 곳이다. 곡성군 입면과 고달면을 서남쪽 경계로 삼고 있는 너른 들의 한 복판에 ‘삼해주’를 만들어 내는
송동면 영촌마을이 있다.
남원 들판의 알곡에서 나온
술
“풍년 들면 쪼금 더 하고, 숭년 들면 못하기도 했지라….” 스물두 살에 시집와 시어머니에게 삼해주 담그는 법을 배웠다는 조순예(66)씨의 기억에도 술은 알곡의 길흉에 밀접하게 닿아 있다. 추수가 끝난 뒤 찬바람이 불 때쯤 담가 이듬해 첫째날인 설에 항아리를 연다는 삼해주는 특히나 더했다. 노동의 보조역할을 하는 막걸리는 알곡의 길흉에 크게 상관하지 않고 빚어내기 마련이지만, 삼해주는 겨울 농한기 동안 숙성하는 술인 데다 막걸리에 비해 그 양을 1/4 밖에 건져낼 수 없는 귀한 술. 까닭에 흉년이 들면 술항아리를 채우려고 쌀뒤주를 비울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영촌마을은 경주 김씨의 집성촌으로 남원 쪽으로는 ‘뒷굴’, 곡성쪽으로는 ‘행진개’라고 부르는
너른 들판을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3·8일 곡성장과 4·9일 남원장을 다 봐 먹는다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 습성으로 미루어 언제나 물산이
넉넉했을 성 싶다.
가양주를 엄격히 금지한 일제시대와 박정희 통치 기간을 거쳐왔음에도 마을 차원에서 한날 한시에
삼해주를 담근 전통이 유지되는 뒷심에는 집성촌 특유의 단단한 연대와 넉넉한 물산이 한 몫 했음에 틀림없다.
“벌금 나오고 술까장 압수 당한디 함부로 담글 수 없었제라. 그래도 종가집에서는 꼭꼭
담갔어라우.”
조씨의 말. 종가집은 지금 서울로 다 이사를 가 버리고 비어 있다. ‘좋은 세상’이 와서 맘
놓고 술을 담글 수 있게 됐지만 금년에 삼해주를 빚은 곳은 네 군데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한 마을에서 이처럼 가양주를 함께 담그는 곳은 흔하지
않다. ‘없다’고 단정해도 틀리지 않는다. 인근 순창과 광주에서도 삼해주를 담그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명맥을 찾기가
어렵다.
세 번에 걸친 돼지날에 술을 빚어
‘三亥酒’
금년 삼해주는 음력 10월2일(양력 10월26일, 이하 날짜 표기는 음력)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담갔다. 멥쌀과 찹쌀 2:1 비율로 죽을 쑤어 여기에 1/5 분량의 누룩을 버무린 다음 독에 넣고 물을 붓는다. 막걸리와 같은 발효주는 밥을 쪄서 빚지만 삼해주는 마치 죽과 같은 밑술을 넣어 담그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로는 6일날 담가야 했는디, 서울서 죽은 사람이 내려온다길래 날을 당겼어라우. 옛날에는
역불러 꼭 그 날 시작했는디 지금은 비껴서 해도 괜찮합디다.”
조씨가 말하는 ‘그 날’은 음력 시월 첫 ‘돼지날’을 말한다. 이 때 돼지는 십이지지十二地支 할
때의 돼지, 즉 해亥를 일컬음이다. 첫 돼지날 밑술을 담가 술독을 지푸라기로 도톰하게 싸서 그늘이 진 서늘한 곳을 골라 땅을 파고
묻는다.
이후 열이틀이 지난 두 번째 돼지날 독을 열어 첫 돼지날만큼의 덧술을 첨가하고, 술독을 새로
바꾼다. 그로부터 또 열 이틀 후에 세 번째로 덧술을 보탠다. 이때는 독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첫 밑술의 절반 가량 되는 찹쌀로 고두밥을
만들어 덧술을 넣는 것이 특징이다.
담근 이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이 가양주의 특성이다. 어떤 이는 멥쌀을, 또 다른 이는
찹쌀을 더 보태기도 한다. 집안 내력에 따라 술맛이 조금씩 다른 이유다. 삼해주가 다른 술들과 다른 점은 매번 덧술을 첨가할 때마다 누룩이
조금씩 더 보태진다는 것. 술독을 개봉하는 날은 이듬해 설이다.
도수 높아 오전에는 안
먹어
술이 다 된 뒤에 술독에 용수를 박아 떠낸 맑은 술을 ‘약주’로 분류한다. 약주 중에서도 특히 공기가 청정(淸淨)한 겨울에 빚어낸 술을 ‘청주’로 이름한다. 삼해주는 청주다. 술맛은 어떨까. 조씨의 바깥양반 김맹수(67)씨는“경주 법주는 대들 못하제”라고 짧게 평했다.
세 번에 걸쳐 덧술을 넣은 삼양주三釀酒이자 청주라는 점에서 경주법주와 삼해주는 같은 반열의 술이라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다만, 하나는 상품이
되어 세상에 나왔고, 다른 하나는 시골 농가의 마당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다른데 “전통 청주는 절대로 상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값을 비싸게 받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양을 댈 수가 없다”는 것. 상품으로 낼 만큼의 양을 만들어 내려면 청주 본연의 맛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동네 어른들한테도 장깍지(간장 종지만큼 작은 그릇)로 한잔밖에 안 드렸제. 귀한 손님이라
하드라도 석잔 이상은 못 줬어.”
양이 많이 나오지 않아 술대접을 넉넉하게 하지 못했다는 뜻.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삼해주는
“석 잔이면 취하는 도수 높은 술”이라는 것. 그래서 삼해주는 또한 “오전에는 안 먹는 술”이기도 하다. 보통의 청주가 20도 안팎인 반면에
삼해주는 “요새 나온 소주(23∼25도)보다는 확실히 더 높다”고 한다. 까닭을 물으니 덧술을 넣을 때마다 누룩을 더 보태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수를 낮추려면 누룩을 덜 넣으면 되는데, 날이 더우면 쉬어질 수가 있다.
“금년에 담근 술을 내년 이맘 때까지 먹어. 땅 속에 독을 그대로 두고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먹는 술이제.”
청주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50∼65℃로 살균하여 미생물과 효소의 대부분을 파괴시킨 다음
저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살균 대신 누룩을 더 넣어 도수를 높이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땅 속에 두고 조금씩 먹으면서 1년이라는 시간을
확보한 술이 삼해주인 셈이다.
조씨가 담근 술은 마당 북쪽에 자리 잡은 화단에 묻혔다. 작은 은행나무들이 술독을 에워싸면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두툼히 쌓인 집단을 걷어 내고 열어 보니 얼큰한 신맛의 막걸리 향이 확 번졌다. 삼해주는 그 속에서 익고 있을
터였다. 남원 땅의 풍성한 곡식과 함께 복을 준다는 돼지날을 ‘삼세번’에 걸쳐 항아리 속에 잡아넣었으니 이 술 먹으면 온갖 좋은 일만 따라 다닐
것이 틀림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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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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