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통영 고속도로 서상IC를 빠져나와 함양 쪽으로 잠시 달리면 서하면 소재지다. 다시 우회전하여 2km쯤에 운곡리라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있다. 은행나무는 약간 경사진 마을의 위쪽에 자란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달리는 자동차 길에서도 마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올 정도이다. 공식 마을이름은 운곡리지만 은행정 마을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나무는 처음 터를 잡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되며, 추정 나이는 800년에서 천년 정도이다. 크기는 높이 38m, 가슴높이 둘레 8.8m, 가지 뻗음은 동서 29.4m 남북 24.5m에 이른다. 우리나라 은행나무로서는 용문사 은행나무가 가장 크고 두 번째 꺽다리가 바로 이 나무다. 주변이 평지라 나무의 위용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온통 주위를 압도하는 거대한 형상이다. 나무의 특징은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굵은 줄기 둘이 서로 거의 붙어 있다. 지금은 약 20cm 정도의 공간이 있으나 1920~30년경에는 어린 아이들이 이 사이에 들어가 놀 수 있을 만큼 넓었다한다. 아마 처음 심을 때 두 나무를 가까이 붙여 심은 것으로 짐작되며, 앞으로 몇십 년 지나면 연리(連理)를 이루어 한 나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아주 옛날 원인 모를 화재로 부락 전체가 소실되고 자라던 원래의 은행나무도 불타버렸으나 새로 움이 돋아 지금의 은행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1993년에 마을에서 세운 비석내용으로 대체적인 내력을 알아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고려시대 때 마을 아래를 흐르는 개양천 가에 마씨 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천재를 만나 개양천은 평야가 되고 마을은 하천으로 변해 버리자 지금의 마을로 이사하여 왔다고 한다. 다시 흙담집을 짓고 살면서 지형을 살펴보니, 마을 전체가 배(舟)모양이라 언제 다시 수해를 입을지 몰라 사람들은 불안해하였다. 이럴 때 사람들은 먼저 비보(裨補)를 떠올린다. 빠진 것 하나가 금세 떠올랐다. 배라면 꼭 있어야 할 돛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돛대 자리에다 은행나무를 심어 완전한 배의 형상을 만들고 마을 이름도 은행정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이후 은행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크게 자랐다. 다만 아쉬움이라면 열매가 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암수가 분명이 다른 은행나무에서 수나무를 심었으니 당연히 열매가 달리지 않았겠으나 옛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무 밑에 우물을 파서 그림자가 비치면 열매가 달릴 것이라고 믿었다. 우물을 파고 열매를 기다렸으나 송아지 등 가축만 빠져죽고 열매는커녕 여러 재앙만이 끊이지 않았다. 우물은 배 모양 마을의 돛대 자리에 구멍을 낸 형상이 되었으니 홍수 때 배가 가라앉아 마을이 망하게 생겼다. 놀란 주민들은 부랴부랴 우물을 메웠다고 한다. 세월이 역사를 만들어 내듯이 오래된 이 은행나무는 이외에도 얽힌 수많은 전설이 있다. 가까이 일제 말기에 있었던 일로 부락의 유지가 이 거대한 은행나무를 매각하려고 모의를 하였는바, 심야에 돌연히 상여가 나가는 곡성이 크게 들리므로 이에 놀라 매각할 것을 단념하였다. 그러자 곡소리는 없어졌지만 팔아 버릴 계획을 세웠던 유지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밤에는 가끔 우는 소리를 내는데, 굉장히 크게 들려 사람들이 두려워한다고 한다. 바람에 가지가 흔들려 나는 소리가 아니고 맑은 날에도 고목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경외(敬畏)와 신비로움을 더한다. 은행나무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지금도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을 울리며 고사를 지낸다. 마을의 동북쪽에는 첫 터전을 잡았던 마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지나온 긴 세월을 알려주고 있다. 은행나무가 내려다보는 마을 전체는 크고 작은 몽돌로 쌓아올린 돌담이 나지막한 시골집들을 둘러싸고 있어서 잃어버린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고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