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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雲林)이라는 당호가 걸 맞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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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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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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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경내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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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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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년월일 : 1981년 10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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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소치(小痴)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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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維)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 한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준 것이며 젊었을때는 련(鍊)이라 했고 자는 마힐(痲詰)이다. 운림산방, 쌍계사,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운림산방에서 약 150m를 오르면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있다.
소치는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 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현,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草衣大師 : 張意恂)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된다.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제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고,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痴)'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痴)라 했다고 한다. | |
* 입장료 : 어른(개인 : 2,000원 단체 : 1,500원) 청소년 및 군경(개인 : 1,000원 단체 : 700원) | |
어린이(개인 : 800원 단체 : 5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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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관광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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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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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는 진도읍에서 동남방으로 왕무덤재를 넘어 7km 쯤 가노라면 반경 2km 정도의 들판을 가운데로 하고 사방으로 산맥이 에워싸고 있는 사천리 76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이 절은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 이름하였다. 사찰 뒷계곡을 따라 10분여를 오르면 천연기념물 제 107호인 50여 수종의 상록수림 3,700평이 우거져 있다. 쌍계사 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1982년 대웅전을 해체하여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의 연대가 강희 36년, 즉 숙종 23년이란 기록이 나와 정확히 1697년에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약 1m의 높이인 자연석 기단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건물은 정면 삼칸, 측면 이칸의 맞배지붕의 다포계양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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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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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온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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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은 일본을 정벌하고자 새로 개발한 화포를 삼별초군과 싸울 때 사용했는데 진도에서 10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삼별초군은 위기에 몰리게 되며, 그들이 궁궐로 사용하던 용장사 큰 가람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패주하던 왕온(王溫)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왕무덤재를 올라 갈 때 말을 거꾸로 탄 채 말꼬리를 붙잡고 달렸다는 얘기가 있다. 어쩌면 낙마하여 꼬리를 붙잡고 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왕무덤에서 붙잡힌 왕온과 그의 아들 항의 목을 치자는 주장과 목숨을 살려 데려가자는 주장이 맞섰지만 결국 이들 부자(父子)는 적장의 칼에 목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자주(自主)를 위해 항거하던 삼별초 정신과 몽고의 속국이 되어 자주항거집단을 토벌하러 나선 고려 개경 정부의 조카들이 진도의 이름없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몽골 장수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만다. 외세의 압력에 따라 조카가 백부를 죽이고 사촌 형제의 목을 치는 고려 왕실의 비극이 논수곡(論首谷)과 논수동(論首洞)이라는 이름을 남겨놓았다. 왕무덤재는 물론 왕온의 무덤이 바로 옆에 자리한 이유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고, 바로 밑에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으나 아들 항의 무덤은 남아있지 않다. 패주하던 삼별초가 돈지에서 둘로 나뉘어 김통정(金通精)은 금갑 방면으로, 배중손(裵仲孫)은 임회 방면으로 도망쳤다. 금갑에서 배를 탄 김통정, 유존섭은 제주까지 건너가 그곳에서 2년 남짓 항몽전을 펴다가 섬멸되었다. 이때 함께 도망치던 여인들은 붙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거두자고 마음 먹고 만길재 밑 우황천에 몸을 던져 자결의 길을 택했다. 그 뒤부터 비오는 날 지나가는 행인들의 귀에 한서린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부여 낙화암과 견줄 수 있는 이야기다. 임회면 방면으로 패주했던 배중손 장군과 그 부하들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마쳤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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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리 상록수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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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읍에서 동남방으로 7km쯤 들어가면 쌍계사와 운림산방을 감싸고 있는 상록수림이 나타난다. 신라시대 창건하였다는 유서 깊은 쌍계사를 옆으로 하고 흐르는 계곡을 타고 올라가면 사방으로 10여 정보 넓이의 두 골짜기에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감탕나무, 종가시나무, 생달나무, 모새나무, 참식나무, 차나무, 자금우, 광나무, 붉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상록활엽수와 마삭줄, 멀꿀, 모잠덩굴 등이 아무렇게나 엉켜져 하늘을 뒤덮고 있는가 하면, 낙엽 활엽수로 졸참나무, 자귀나무, 느릅나무, 말오줌때, 쥐똥나무, 실거리나무, 삼색싸리, 소사나무, 잘매나무, 윤노리 나무, 굴피나무, 예덕나무 등이 하늘을 뒤덮는다. 계곡을 따라 10분여를 오르면 천연기념물 제107호인 50여 수종의 상록수림 3,700평이 우거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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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림으로 뒤덮인 골짜기에서 제일 무성한 지대 3,700평을 골라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을 지정하였는데 무더운 한여름에도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으면 오싹한 오한을 느끼고 빽빽한 풀숲의 돌위에 앉아 있으면 바로 옆 사람의 소근거리는 다정한 말소리는 들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 수풀로서 장관을 이룬다.
이중에서도 특히 삼색싸리는 이 지역의 특산으로서 그 수가 비교적 많이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07호인 사천리 상록수림은 한여름 무더위도 그 위세를 펼 수 없으며, 여름에 나무가 우거진 그늘을 찾아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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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10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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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적 : 3,7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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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의신면 사천리 32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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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년월일 : 1962년 12월 3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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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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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진도간 직통버스 : 1일 31회 운행. 2시간 3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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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 진도간 직통버스 : 1일 20회 운행. 1시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