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보다가 이런 글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만들고 싶은 달력이 하나 있다. 계절마다 나는 과일, 꽃, 그리고 생선을 표시한 달력이다. 예를 들어 곶감을 먹으려면 경북 상주에 언제쯤 가면 좋고, 국화를 보려면 언제 고창의 미당 서정주 생가 근처에 가면 되고, 라일락을 보려면 어디가 좋고, 겨울 소나무는 어디에 멋진 자태의 소나무가 있다는 식이다. 이 모든 세세한 정보를 표시해 놓은 달력을 가지고 있으면 시간낭비가 적을 것이다. 이런 달력 하나 가지고 조선팔도를 돌아다닌다면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있을 법하다.”〈조선일보 2007년 12월 6일자 ‘조용헌 살롱’〉
‘이런 달력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 싶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얘기해보니 자기들도 그런 달력이 있다면 유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맛 다이어리 2008’을 만들었습니다.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있습니다. 이 음식을 월별로 정리했습니다. 음식의 맛과 유래, 먹는 방법, 그리고 어디에 가야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를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꺼내보도록, 오려내기 쉽게 지면을 편집했습니다.
- 물론 이 정도 정보만으로 음식을 먹으러 여행을 떠나기는 힘듭니다. 맛 다이어리에 월별로 소개한 음식 중 하나를 앞으로 매달 소개하려고 합니다. 음식이 가장 제철인 시기에, 가장 흔하게 나오는 지역을 찾아, 가장 맛있게 요리해 내는 식당을 골라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맛 다이어리 2008’을 D1~3면에 소개합니다. 물론 여기 소개한 ‘제철’은 맛이 들기 시작한 시기이거나, 관련 도시에서 축제를 하는 시점 등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음식 맛이 그렇듯, 이 ‘제철’이란 것도 들쭉날쭉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세세한 정보를 채워 드리겠습니다.
1. 아귀|마산 홍어|흑산도·목포
- 그물에 걸리면 “에이, 재수 없어”라면서 바다로 텀벙 내던졌다고 해서 ‘물텀벙’이란 별명을 가진 아귀. 한국에선 1960년대 중반 경남 마산에서 아귀를 먹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아귀를 맛보려면 그래서 마산에 가볼 만하다. 아귀 요리 전문점이 오동동 사거리 일대에 몰려있다. 찜은 물론 수육, 내장수육, 불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귀 요리를 낸다.
전라도 사람들의 ‘소울 푸드’인 홍어는 겨울부터 3월까지가 제철이다. 전남 흑산도 예리항에선 홍어 경매가 열린다. 울룩불룩한 살결이 불그레하다. 옆에 놓고 보면 칠레산은 밋밋하다. 맛도 그렇다. 홍어는 회나 구이, 찜, 찌개 등 다양하게 먹을 수 있지만 역시 삭혀 먹어야 제맛이다. 화장실을 연상케 하는 고약한 냄새는 요소 때문이다. 홍어 몸 속에 요소가 많은데, 요소가 암모니아로 변하면서 특유의 냄새를 낸다. 요소는 사람의 오줌에도 많다. 그러니 냄새도 비슷할밖에. 흑산도에서는 알싸한 홍어를 서울보다 훨씬 싸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흑산도 들어가기가 그리 쉬운가. 아쉽지만 목포에서 입맛을 달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2. 도다리쑥국|통영 새조개|남당리 황태|인제
- 냄비 물이 팔팔 끓으면 도다리를 넣는다. 양념은 무 몇 조각, 마늘, 풋고추, 파 정도가 고작. 도다리가 익었다 싶으면 햇쑥을 끊어 넣는다. 별 솜씨 부리지도 않았건만, 그렇게 시원하고 향긋할 수 없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쑥은 이때가 지나면 뻐세서 맛이 떨어진다. 도다리쑥국을 초봄 한 달 남짓밖에 맛보지 못하는 까닭이다. 도다리쑥국을 먹으려면 역시 경남 통영이다.
껍데기를 벌리면 발과 몸통, 내장이 드러난다.길고 통통한 발은 가운데가 살짝 구부러지고 끝은 뾰족해서, 얼핏 작은 새처럼 보인다. 새조개다. 뜨거운 물에 새조개를 살랑살랑 흔들어 꺼낸다. 입 속에서 감칠맛이 폭발한다. 전남 여수와 경남 일부에서 나던 새조개가 1980년대부터 충남 홍성군 남당리 앞바다에 나타났고, 서울에서도 각광받게 됐다. 매년 2월 남당리에선 새조개 축제가 열린다.
인제 등 강원도에서는 날씨가 추워지면 명태를 엮어서 덕장에 내건다. 얼었다가 녹기를 되풀이한다. 명태 살이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황금빛으로 변신한다. 황태다. 황태는 3~4월 본격적으로 출하된다. 하지만 2월쯤 강원도에 가면 황태 수천 마리가 덕장에 걸린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3. 마른굴비|영광 매실|광양
- 요즘 굴비가 예전만 못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는 조기를 짜게 소금 간 하고 오래 말려 굴비로 만들었다. 냉장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굴비는 1㎝ 차이에도 값이 크게 달라지는 데다, 도시 사람들이 덜 짜고 통통한 굴비를 더 쳐준다. 7~14일 정도만 말려 물을 뺀 ‘물굴비’를 냉동시켰다가 유통한다. 옛날식으로 꾸덕꾸덕하고 짜게 말린 굴비는 3월초 짧은 기간 전남 영광에 가면 맛볼 수 있다. 영광에선 ‘마른 굴비’ 혹은 ‘봄굴비’라고 부른다. 쌀뜨물에 담가뒀다가 솥에 쪄내면 예전 ‘밥도둑’ 명성 그대로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는 ‘매화마을’로 알려졌다. 매년 봄이면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불어오는 봄바람에 묻어있는,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매화 꽃 냄새가 마을을 휘감는다. 매실은 4월부터 맺히기 시작해 5월 말에서 6월 초 수확을 시작하니, 꽃 구경이냐 매실 맛보기냐는 선택에 달렸다. 행복한 고민이다. 매실은 맛도 맛이지만 건강에 좋다. 해독 작용과 살균성이 강하다고 한다.
원문출처 : [맛 다이어리 2008 #1] 달력만 넘겨도 군침이 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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