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봄빛 가득한 남녘의 섬, 진도
글·사진 / 양영훈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
전남 진도에는 겨울이 없다. 동지섣달에도 춘삼월처럼 기온이 푸근하다. 어쩌다 큰 눈이 내려도 금세 봄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대파, 마늘, 봄동 등으로 파릇한 들녘 풍경을 보면 겨울철임을 실감키가 더 어렵다. 진도는 예술의 고장이자 민속의 보고로도 유명하다. 게다가 푸른 바다에 숱한 섬들이 보석처럼 박힌 진도의 다도해 풍광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진도에 가면 오감이 즐겁고, 어깨가 저절로 들썩거려진다.


지난 2001년 말경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린 뒤로는 진도 땅을 찾아가기가 퍽 수월해졌다. 하지만 그곳의 독특한 매력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서울에서 진도까지 꼬박 한나절 가량의 기나긴 여정조차도 별로 지루하진 않았다. 그래도 해남 우수영을 지나 진도대교에 막 접어들 때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진도대교는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자태의 쌍둥이 사장교이다. 진도대교가 놓인 울돌목에는 늘 홍수 난 강물처럼 거센 조류가 쉼 없이 흐른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 9월 16일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써 왜선 133척을 격파한 명량대첩도 이 조류를 활용한 것이었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인해 전라도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려는 왜군의 야욕은 물거품이 되었고,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은 다시 이순신 장군 휘하의 아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대교 옆의 녹진전망대에 올라서면,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한 명량대첩의 역사현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날의 승리를 자축하는 조선 수군들의 함성도 연신 귓전을 때리는 바람소리에 뒤섞여 들리는 듯하다.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읍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일부러라도 군내간척지 방면으로 에돌아 가는 것이 좋다. 군내방조제와 수유방조제 주변의 수로와 갈대밭에는 해마다 찬바람이 불면 고니(백조, 천연기념물 제201호), 저어새(천연기념물 제205호), 기러기 등의 겨울철새들이 떼지어 날아들어 겨울을 난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485m) 자락에는 운림산방과 쌍계사가 있다. 운림산방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그림으로) 압록강 동쪽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들었던 소치 허련이 만년에 낙향해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또한 그의 아들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도 여기서 태어났다. 겨울철의 운림산방은 인적조차 뜸하지만, 허씨 3대의 묵향(墨香)은 여전히 그윽하다. 그리고 쌍계사는 통일신라 때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하지만 예스러운 멋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절집 자체보다는 뒤편의 상록수림이 더 인상적이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등을 비롯해 50여 종의 상록수가 우거진 첨찰산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낮에도 어둑할 정도로 울창한 이 숲에 들어서면 맑고 깨끗한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하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춘흥(春興)을 못 이긴 동백이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림으로써 파릇한 잎과 붉은 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특히 겨우내 날씨가 따뜻했던 올해는 동백꽃이 유난히 곱고 어여쁘다.
진도에는 매우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절경이 많다. 내륙과 동남부 해안을 한 바퀴 도는 18번 국도를 타면 진도 땅의 빼어난 절경을 대부분 만날 수 있다. ‘모세의 기적’을 만날 수 있는 회동마을, 아담한 성벽과 무지개다리가 있는 남도석성도 이 국도변에 위치한다. 고군면 회동마을과 의신면 모도 사이의 바다가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은 달의 인력이 가장 큰 음력 2, 3월의 영등사리에 발생한다. 이 때 폭 40m, 길이 2.8km의 바닷길을 따라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걷는 광경은 마치 영화 『모세』의 한 장면처럼 장엄하고도 감동적이다. 이 회동마을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뽕할머니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회동마을에 성질 사나운 호랑이가 침범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뽕할머니만 남기고 모두 바다 건너 모도로 피신했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 용왕님께 기도를 하다가 꿈속에서 바다가 열린다는 계시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바닷길이 열리고 뽕할머니는 모도로 건너가 가족들을 만났으나 너무 기진맥진한 나머지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한다. 오늘날 마을사람들은 모도가 빤히 보이는 바닷가에 뽕할머니상도 세우고, 영등사리 때에는 영등제와 함께 뽕할머니 제사도 지낸다.
임회면 남동리의 남도석성(사적 제127호)은 고려 때 몽고침략군에 맞서 싸운 삼별초군의 근거지였다. 삼별초군의 지도자였던 배중손 장군도 여기서 전사했다. 현재의 남도석성은 성벽 높이가 4~5m이고 둘레는 540m쯤 된다. 성벽의 동·서·남쪽에는 출입구가 하나씩 있다. 지금도 성 안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출입구로 사용된다. 성벽 바깥쪽에는 세운천이 성벽을 따라 흐르다가 곧장 바다로 흘러든다. 남문 앞의 세운천에는 편마암 판석으로 독특하게 쌓은 두 개의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다. 형태와 재질이 퍽 소박한데도 무지개다리 특유의 곡선과 우아함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현재 진도에는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민속이 네 가지나 전승돼 오고 있다. 강강술래(제8호), 남도들노래(제51호), 씻김굿(제72호), 다시래기(제81호)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땅에 전해오는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대표로 꼽히는 진도아리랑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도 땅에 가면 꼭 한번쯤은 전통민속공연을 봐야 한다. 임회면 상만리에 자리한 국립남도국악원(061-540-4033)에서는 연중무휴로 매주 금요일마다 수준 높은 국악공연이 열리고, 금~토요일에는 1박2일 가족주말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직접 진도 소리꾼들의 구성진 남도 가락과 다채로운 사설을 보고 듣노라면, 오늘날 진도를 ‘민속의 보고’, 또는 ‘원형의 섬’이라 일컫는 이유를 저절로 깨닫게 된다.
진도 땅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할 즈음이면, 지산면 세방리로 달려가야 한다. 진도의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 외딴 마을은 몇 해 전 기상청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조가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된 뒤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세방리 가는 길에 만나는 다도해 풍광은 아주 매혹적이다. 허름한 초가집 몇 채가 듬성듬성 남은 마을도 지나고, 물새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저수지도 만난다. 제법 너른 간척지를 가로질러 특이한 바위산 아래를 지나면,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어디나 흔한, 그렇고 그런 바다가 아니다. 평온한 바다에 보석 같은 섬들이 점점이 박힌 다도해다. 세방리를 중심으로 한 진도군 지산면의 다도해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어느 다도해보다도 아름답고 순결하고 따뜻하다. 맑은 바다 위에 흩뿌려진 섬들의 자태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사람의 손길을 크게 타지 않은 자연은 더없이 순수하다. 그토록 아름다운 바다, 때묻지 않은 풍경 속으로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간다.
세방리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시간차에 따라 금빛, 주홍, 선홍 등으로 변화하는 노을 빛이 현란하다. 제 모습보다 더 고운 노을을 흘린 해는, 어느 섬 뒤로 슬며시 모습을 감춘 듯싶더니 주저 없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하지만 상황이 모두 종료된 것은 아니다. 노을의 여운이 햇살보다도 길게 남는다. 그리고 마침내 찬란한 저녁놀마저 첫사랑의 추억처럼 희미해지고 나면, 초롱초롱한 별빛들이 다도해의 하늘을 수놓는다.


여행정보

|숙박|
임회면 상만리의 옛 상만초교에 조성된 나절로미술관(010-9457-8841)은 화가 이상은 씨가 10년 넘게 공들여 꾸민 이색숙소이다. 진도읍내에는 남강모텔(061-544-6300), 프린스모텔(061-542-2251) 등의 장급여관과 모텔이 많고, 진도대교 부근의 군내면 녹진리에도 진도관광모텔(061-542-2122)을 비롯한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맛집|
진도읍내의 제진관(061-544-2419)이 간재미찜을 잘하기로 소문난 맛집이고, 사랑방식당(061-544-4117)은 매생이국도 잘 끓이고 바지락회도 맛있는 집이다. 그밖에 세방리 낙조전망대 부근의 다도해관광횟집민박(061-543-7227)은 생선회와 매운탕, 진도읍내의 옥천횟집(061-543-5664)과 돌담한정식(061-544-1170)은 한정식을 잘한다. 그리고 임회면 죽림리 강계마을은 진도군 제일의 굴 마을이다. 마을 앞바다가 온통 굴 양식장이어서 싱싱한 굴을 이용한 구이와 물회를 싼값에 맛볼 수 있다.
진도홍주는 알코올도수가 40도가 넘는데도 맛이 좋고 뒤끝이 깨끗한 명주이다. 전라남도에 의해 진도홍주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허화자 할머니(061-543-0463)는 홍주를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빚는다.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2번 국도)→영산강하구언→삼호조선소 입구(49번 지방도)→금호방조제→문내(18번 국도)→진도대교→→진도

모처럼 만의 폭설에 뒤덮인 남도석성의 한겨울 풍경
첨찰산 상록수림과 맞닿아 있는 쌍계사의 동백숲과 관음보살상
녹진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진도대교와 울돌목의 밤 풍경
한겨울에도 대파, 봄동, 마늘이 파릇파릇한 진도의 들녘
지산면 세방리의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일몰
제진관의 간재미찜
군내간척지 수유방조제 부근의 수로에 날아든 저어새와 기러기
첨찰산 자락에 등을 기댄 운림산방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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