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추밭 용장리 가는 길에서 만난 배추밭. 진도 들녘에는 어디나 배추밭과 파밭이 있다.
ⓒ 이현숙
 배추밭

용장산성을 찾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진도대교를 건너 벽파까지는 거의 외길로 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냥 직진해 갔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차를 세우고 물었더니 다시 벽파로 돌아가서 마을 안길로 들어가야 한단다. 가리켜준 대로 벽파로 되돌아왔지만 그럴듯한 길은 보이지 않았고, 세 번을 물은 다음에야 겨우 용장리에 있는 용장산성을 찾았다.

 

   
▲ 용장사 용장산성 옆에 있는 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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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산성

용장산성은 대몽 항쟁의 치열한 격전지로 고려장군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11년 동안이나 맞서 싸웠던 곳. 과연 용장산성은 은거지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용장리를 감추고 있는 용장산 너머는 바로 벽파. 그들이 벽파에서 내려 산을 넘어왔는지, 아니면 마을 길을 돌아서 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곳은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쏙 들어가 숨어 있었다.

 

당시(고종 18년, 1231), 세계 최강의 몽고군은 고려를 침공해 왔다. 몽고군을 맞은 고려는 임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40년 동안 피 튀기는 전쟁을 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였던 고려는 마침내 항복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에 삼별초 배중손과 그를 따르던 군사들이 불만을 품고 몽고군과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 용장산성 터 용장산성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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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산성

그들은 고려 원종의 육촌인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1천여 척의 배에 군사들과 가족들, 그리고 무기와 식량을 싣고 진도로 내려왔다. 이때 몽고군과 고려 왕실에 시달리던 많은 백성들도 삼별초을 따라 내려왔으며, 이곳에 궁궐을 짓고 산성을 쌓아 몽고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그 성이 바로 용장산성(사적지 126호)이다.

 

이곳이 삼별초의 근거지가 되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강화도에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던 함선의 이동이 쉬웠고, 몽고군이 가장 난처해 하는 섬이라는 것. 강화도와 비슷하게 넓고 육지가 가까워서 만약의 경우에는 자급자족도 가능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성벽은 서벽이 망바위를 지나 토성으로 이어져 벽파진 북쪽 바다에까지 닿아 있으며, 축성 연대는 1270년 6월 이후로 추정. 현재는 용장산 좌우 능선을 따라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성내에 용장사지와 행궁지가 보존되어 있다.

 

   
▲ 남도 석성 남서쪽으로 난 남문과 만호비. 조선시대 무관이었던 만호들의 공덕을 새겨놓은 비이다. 마을 중앙에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의 합의로 동문쪽으로 옮겨놓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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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석성

그런데 삼별초와 관련된 곳은 또 있었다. 바로 남도석성(진도군 임회면 남도리)이다. 남도 석성은 가는 길은 길었지만, 찾기는 쉬웠다.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기도 하고 산을 넘으며 달리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나 주었다.

 

남도석성은 남서쪽 끝 부분에 있고, 용장산성은 북동쪽에 있다. 그리고 이 두 곳은 다 고려말 삼별초가 몽고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다. 남도석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이 여몽연합군에 쫓겨 최후를 마친 곳이라고 알려졌으며, 둘레 610m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현재의 성은 조선 중기 다시 축성했으며 당시 조선의 수군이 왜군을 경계하기 위해 다시 쌓았다고 한다.

 

세상에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지고 아담한 성이 있다니!

 

   
▲ 남도 석성 성위로 난 길. 왼쪽은 성안에 있는 마을이고, 오른쪽은 성밖에 있는 마을이다. 성위로 올라가면 바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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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석성
   
▲ 관아 성안에 있는 관아. 예전부터 있던 게 아니라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옛모습을 살려 복원한 것이다.
ⓒ 이현숙
 남도 석성

그런데 내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지고 아담한 성(둘레 610m의 원형)이 있다니! 마치 유럽의 한 마을을 차지하고 다스리던 성주의 성처럼 마을을 안에 두고 둥글게 감싸 안은 성. 훼손되거나 윤색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성이 이 먼 곳 진도에, 정말 놀라웠다.

 

해미읍성이나 낙안읍성 등과 같은 다른 성들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건재하기도 했지만 조금도 윤색되지 않은 본모습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 남도 석성 성 안의 동네...조상때부터 살았다는 어르신은 이곳을 떠날 일이 걱정이라고 하셨다.
ⓒ 이현숙
 남도석성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없고, 특별히 관광객을 배려하기 위한 주차시설이나 관리소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바다를 마주한 시골마을 한가운데를 의연하게 차지하고 있는 성이었다. 게다가 성안에는 20여 가구 집이 있었고,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물론 그 집들도 낡은 모습 그대로였다.

 

제발 재정이 부족해서라도 개발을 미뤘으면...

 

마당에서 일을 하시던 동네 어르신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이 마을은 증축도 개축도 할 수 없어 무척 불편하다고 하신다. 게다가 이젠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하는데, 조상대대로 살아온 집을 어찌 떠나느냐고 한탄하신다.

 

동네 어르신의 걱정도 마음에 와 닿았지만, 옛 풍경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해 나는 그만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존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렇다고 몽땅 개발해 버리면 결국 본모습은 완전히 잃게 마는 것이다. 한 번 잃은 것은 영영 되찾을 수도 없고.

 

   
▲ 남도 석성 동문쪽 성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문도 없는 휘어진 길로 성안으로 들어 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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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석성
   
▲ 남도석성 남문을 거쳐 성곽 위로 둥글게 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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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석성

아마 이곳도 머지않아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주민 이주를 재촉하는 걸 보면 관광지로의 개발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제발 재정이 부족해서라도 개발을 미뤘으면 하고 바라보지만 나 하나의 바람으로 개발이 중단되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 배중손 장군 사당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있는 배중손 장군 사당.
ⓒ 이현숙
 배중손 장군 사당

차를 돌려 돌아오는데 자꾸 뒤통수가 켕겨온다. 아무래도 성의 앞날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 여태까지, 그리고 거의 모든 역사적인 유적지가 그래 왔던 것처럼 혹여 주민을 내보낸 자리가 장터가 되지는 않을까? 내 생각이 그저 부질없는 노파심이기를 간절히 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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