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에 억새꽃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주말입니다.
성가시게 괴롭히는 감기 후유증으로
몸뚱이는 물먹은 솜이불처럼 무겁기만 합니다.
친지의 혼례식을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내달려 도착한
시골마을은 벌써 어둠속에 묻혔버렸습니다.
딸네 집에 오신 장모님도 따라 나섰습니다.
새벽공기가 쌀쌀하다 못해 한기마저 느껴집니다.
동이 트는 산골마을은 평범한 일상이 잔잔하게 펼쳐집니다.
여느 시골 가을모습과 같은 넉넉한 풍경입니다.
가뭄 탓에 산국의 때깔이 곱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산비탈에 펼쳐진 밭뙈기엔 고구마가 농부의 손길을 기다기고
잎사귀를 떨쳐낸 들깨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입니다.
그저 눈으로 한번 쓱 훑어보았는데도 한 폭의 수체화가 저절로 그려집니다.
이슬이 마르기전에 들깨수확을 마치려니 마음이 급해집니다.
이슬이 마르면 꼬투리에서 들깨 알이 낫질할 때의 충격과 옮기는 과정에서
튕겨 달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옆지기가 서투른 낫질을 해대며 거들고 나섭니다.
뿌리째 뽑히는 것이 잘린 것보다 훨씬 많아 보입니다.
잎사귀를 모두 떨쳐내고 갈색의 꼬투리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쏟아진 들깨 알이 땅바닥에 나뒹굽니다.
베어낸 줄기는 작은 단으로 묶어 쉼터마당한편에 일렬로 가리를 짓고
혹시 내릴 비를 피하기 위해 그 위에 비닐을 씌웁니다.
뻔한 결과를 예견하고도
약제사용을 자제했던 귀족서리태(검은콩)의 작황은 썩 좋지 못합니다.
씨만 뿌리고 거름한번 농약한번 치지 않고 자연 상태에서 그대로 내버려뒀습니다.
꼬투리의 절반은 톱다리허리노린재가 자기 몫이라며 챙겨갔습니다.
너저분하게 달린 텅 빈 꼬투리에서 쉽게 눈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안전한 먹걸이를 만들고자했던
자신과 한 다짐이자 약속이 어긋나려합니다.
허탈한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풋풋함이 남아있는 콩대는 남기고 나머지는 뽑아내서
흙과 잎사귀를 털어내고 원두막으로 옮겨 타작을 위해 건조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어이! 영수.
고구마 안 심었지?
어서 와 한고랑 캐 가져가……."
가을걷이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이웃 밭에서 고구마를 캐던
동네아저씨가 한 두둑을 캐 가라고 선뜻 말씀하십니다.
여름 내내 땀 흘린 보람과 노동의 대가를 송두리째 가로채는 것 같아 망설였습니다만
갑자기 욕심을 내는 옆지기의 압력에 굴복해
그만 못 이기는 척 고구마 캐는 일에 끼어들었습니다.
장모님도 고구마 순 따는 재미에 푹 빠져듭니다.
앞장서서 고구마 순을 낮으로 걷어내자
마치 횡재라도 한 것처럼 들뜬 표정으로
옆지기는 고구마가 호미에 긁혀 상처라도 생길까 봐 조심조심 흙을 파냅니다.
길쭉길쭉하게 생긴 호박고구마가 땅속깊이 묻혔습니다.
낫으로 껍질을 벗겨낸 호박고구마를 한 입 깨무니 단맛도 없고 밍밍하기만 합니다.
겨우내 먹을 고구마 걱정은 덜었습니다.
고구마 다이어트를 할 거라며
옆지기의 입가에서 맑은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순하고 해맑은 미소입니다.
단풍소식도 들립니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