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나들이
추석입니다.
삶의 파도에 떠밀려 고향 가는 길을 그만 포기했습니다.
명절 내내 팔순의 노모와 형제들이 눈에 밟힙니다.
함께하지 못한 섭섭함보다
같이 나누지 못함을 위로하고 배려해준 가족들의 참한 마음씨가 고맙기만 합니다.
훈훈한 정에 끌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님을 절감합니다.
다락골에 왔습니다.
한 무리의 귀성행렬이 휩쓸고 지나간 서해안고속도로는
추석날 새벽 가끔 한두 대의 차량만 오고갈 뿐
마치 태풍전야처럼 고요함을 넘어 정적마저 감돕니다.
마감을 앞둔 초록세상은 벌써 가을빛이 번지고 있습니다.
길게 이어진 밭뙈기 앞 다랑이 논에도 누런 황금물결이 잔잔하게 물결칩니다.
평화롭고 풍성한 추석명절입니다.
뜬금없이 나타난 주인모습에 꽃망울을 터뜨리던 샛노란 국화꽃이 맨 처음 반깁니다.
주고받는 묵언의 대화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느끼려듭니다.
갑갑했던 숨통이 금세 누리러집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
그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자연의 섭리와 에너지, 그리고 생명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다락골에서 배운 소중한 가치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기 시작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도 느끼게 하는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추석날까지 일 부려먹는다며 한 번씩 해찰을 부리지만
옆지기는 붉게 물든 고추밭에서 홍고추를 수확하는 재미에 빠져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따던 수확초기에 비해 서서 고추를 딸 수 있어
조금은 수월해보입니다.
수확한 고추들의 길이가 짧아졌고 껍질도 두꺼워진 것을 보니
올 고추농사도 끝물에 가까운 낌새가 느껴집니다.
녹색의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줄기째 말라버린 더덕 밭은
후다닥 달아나는 가을을 꼭 빼닮았습니다.
말라버린 줄기에선
벌써부터 쓸쓸함과 무상함이 물씬 풍깁니다.
잘 여문 꼬투리만 골라 씨앗을 채종합니다.
올봄에 1년생 종구를 이식한 더덕들이 제법 실하게 밑이 들었습니다.
문득 그곳에 가고 싶다는
강한 유혹에 홀린 때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풍경보다 풋풋한 냄새에 더 현혹되곤 합니다.
배추 등속 김장채소들이 훌쩍 커버린 채마밭에서 눈길을 거둬드리기가 싶지 않습니다.
자연이 베푼 축복과 과분에 넘치는 배려에
그저 감사하고 감탄할 뿐입니다.
속이 들어차기 시작한 배추밭엔 고랑까지 매운 배추잎사귀로 발을 내딛기조차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다락골에 도착해서 해야 할 계획 중
첫손가락으로 꼽았던 배추벌레잡기와 물주기 계획은 기분 좋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간혹 2-3포기에서 벌레들의 가해흔적들이 관찰됩니다만
추석명절처럼 풍성한 마음으로
경계를 허물어 공존하는 방향으로 길을 택했습니다.
부잣집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마음이 한결 여유롭고 넉넉합니다.
어떤 이는 "다락골에 또 가느냐?" 묻기도 합니다.
"순수한 열정보다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는지?"
가끔은 자신에게 되묻곤 합니다.
오늘도 나는 다락골의 한순간과 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언제나 이곳은 처음 맞선보던 그 느낌대로 내게 다가옵니다.
기다리는 마음도 새롭고 설렘으로 가득한 마음도 항상 새롭습니다.
이곳은 내가 이곳에서 머무른 시간만큼
만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이곳에 오면 밀려들던 거센 삶의 파도도 잠재울 수 있고
지난날을 반추하며 앞으로 살아갈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텅 빈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 좋습니다.
가을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애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