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막에 앉아 잠시 숨을 고름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봅니다.
어느새 선선해진 바람
아니 서늘한 느낌마저 살갗을 스칩니다.
티 없이 맑은 푸른 하늘
누렇게 색이 바랜 은행열매
사시사철 화려하지 않고 자잘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
다락골에도 가을빛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갈망하면서도
떠날 때에 맞춰 제자리에서 호젓이 피고 미련 없이 스러지는
자연의 위치가 한동안 마음속에 머무릅니다.
작은 밭뙈기를 일구는 일도 행동이 따라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맘 내킬 때 찾아왔다
자기 맘 내킬 때 도망쳤습니다.
늘 시간만 부족하다 둘러대기 바빴습니다.
지난 주말엔 조상 묘에 벌초 가는 차량행렬에 끼여
도로가 꽉 막힐 것만 같아 멋대로 오는 길을 포기했습니다.
그 사이 다락골에선
키가 커버린 배추밭에 벌레막이로 둘러쳐놓은 한랭사를 벗겨내야 될 것 같다는
기별이 전해집니다.
손때 묻은 생명들이 눈에 몹시 밟혔습니다.
2주째 챙기지 못해 토라진 생명들의 침묵이 부담으로 남았습니다.
"배추가 왜 이렇게 많이 컸어요?
3주 만에 밭뙈기에 온 옆지기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합니다.
부풀리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만
2주 동안 훌쩍 커버린 배추 등 김장채소들이
쉰두 살 사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합니다.
빡빡머리 학창시절
첫사랑 그녀를 읍내 붕어빵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재연됩니다.
마주한다는 설렘과 행여 잘못되진 않았을까하는 불안감이 복잡하게 뒤섞여
오는 길 내내 답답하기만 했던 숨통이 가을바람만큼이나 개운합니다.
마치 빨리 자라기 경주라도 하듯 밭고랑을 빈틈없이 채우면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잘 컸습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 덕에
지난 몇 년간 배추밭을 절단 냈던 민달팽이가 사라졌습니다.
배추 골에 씌워둔 한랭사는
지인이 손을 써 벌써 말끔히 치워졌습니다.
조심스레 배추속살을 풀어헤치며
일일이 잎사귀의 품을 벌려 햇볕이 골고루 스며들게 정성을 다합니다.
작은 풀 한포기, 하찮은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다루지 않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이 오늘도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부드러운 배춧잎만 골라 입맛대로 먹어치우고 흘려놓은 배추벌레의 배설물들이
간간이 널렸습니다.
토실토실 살찐 몸뚱이를 움찔하며 잽싸게 배추속살로 파고들어 몸을 숨기는 모습이
꼴불견입니다.
극성맞은 벌레들이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숨죽이며 잡아내느라 진땀께나 흘렸습니다.
공존하지 못하고 설익은 자연주의자로 남고 말았습니다.
실하게 여문 땅콩 밭에서
가을 속에 살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벌써 눈치 빠른 들짐승의 약탈흔적들로 너저분한 땅콩 밭에서 올해 첫 가을걷이를 합니다.
우르르!
따라 나오는 풋 땅콩 모습이 압권입니다.
우와! 우와! 열린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이른 봄 한 톨의 씨앗이
맨땅에 묻혔다 5개월 동안 자연에서 누린 혜택으로 수십 배 살을 찌워
아낌없이 주인에게 되돌려줍니다.
처음 심어 본 작물이라 은근히 걱정했는데
가을을 맛보는 첫 징조가 흐뭇함과 풍성함으로 넘쳐납니다.
무심코 받는 따듯한 한마디 말
자기 일처럼 챙겨주던 손
들킨 듯 말듯 내비친 작은 미소
가는 길에 먹으라며 들려주는 단감 서너 개
…….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들과 마음껏 대화하며
어르고 달래고 매만졌습니다.
작은 손길에도 실한 결실로 주인을 배려하려 애쓰는 모습들이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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