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할 수 없었다.
두 주째 홀로 남겨 둔 다락골 생각에 마음을 빼앗겨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고 어둠속에서 갇힌 영동 땅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상쾌한 새벽공기가 서늘하다 못해 찬 느낌으로 옷깃을 세우게 했다.
고된 삶속에서도 동행한 옆지기가 두 시간째 곤한 잠에 취해있는 사이
가을햇살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다락골로 들어섰다.
간밤에 야콘잎에 살포시 내린 무서리가 햇볕에 반사되어 황홀경을 연출했다.
헤어짐은 고통이었다.
인터넷 오프라인에서 사귀였던 얼굴모른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
'영동가는길'은 고향집 찾아가듯 포근함과 설렘으로 충만했다.
심장박동은 요동쳤고 만나는 이마다 분에 넘치는 관심과 애정을 가을햇살만큼이나
베풀어주었다.
마주앉은 벗들과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살아가는 재미를 함께 나눈다.
'만남' 그 자체가 그저 즐겁고 함께 느낀 행복했던 그 순간이 마냥 고맙다.
세상과 소통하는 또 다른 공간속에서 훔쳐오고 싶은 사람 살아가는 끈끈한 이야기들을
가슴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았다. 

 

 

 


서리를 맞으며 귀족서리태가 알알이 여물었다.
여름 내내 입고 있던 초록 옷들이 빛이 많이 바랬다.
멀리 안데스산맥에서 건너온 야콘들만 마지막 남은 가을 햇살을 즐기며 생기발랄한 모습
이지만 바로 옆자리에 자리를 잡은 울금 잎도 차츰차츰 누렇게 변해만 간다.
밭두렁 가장자리와 울금 골에 사이짓기(간작)했던 들깻잎들이 누런빛을 띠며 하나, 둘 땅바닥에 내려앉고 꼬투리도 갈색으로 시나브로 빛이 바랬다.
지금 다락골에선 들깨수확이 절정인 듯하다.
다른 작물에 비해 일손이 덜 가는 들깨는 나이 드신 마을사람들이 검은콩(서리태)과 더불어
밭뙈기와 논두렁에 즐겨 심는 작물이다.
들깨는 잎이 누렇게 변색되어 떨어지기 시작하고 먼저 여문 꼬투리가 갈색으로 퇴색되는 때가 수확할 시기란다.
밤새 촉촉이 이슬까지 내려 수확하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작은 포장을 밭두렁에 펼치고 한 포기씩 낫으로 베어내 수북이 쌓아 올렸다.
진한 들깨향기가 코 안에서 떠나 줄을 모른다.
겉절이 김치를 담겠다며 속이 찬 배추들을 뽑아내 손질을 마친 옆지기가 낫을 챙겨들고 거들고 나섰다.
"당신이 낫질하려고?
손 다치지 말고 베어낸 것들이나 단으로 묵기나 하세요."
낫질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도시 아줌마인지라 선뜻 일 시키기가 겁부터 난다.
깻대를 붙잡고 기를 쓰다 죄다 뿌리 채 뽑아 놓는다.
"서방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낫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일 못하는 자신은 탓하질 않고 말 못하는 연장에 대고 괜한 푸념만 늘어놓는다.
하지 말라는 충고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덤벼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아줌마! 낫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네요."
구시렁대는 꼴이 듣기 싫어 참견을 했다.
"깻대를 붙잡은 손은 앞으로 밀어주고 동시에 낫은 살짝만 당겨주는 기분으로 낫질을 해봐요.
당신처럼 낫도 당기고 깻대를 붙잡은 손까지 함께 당기면 깻대가 잘리지 않고 뽑히는 것이에요."
두세 번 자세까지 교정해주며 요령을 가르치니 금세 적응하기 시작한다.
사내들도 베어내기 힘든 굵은 줄기까지도 쓱쓱 잘라낸다.
가만히 지켜보니 일부러 먹기 안성맞춤이다.
입가엔 작은 미소가 스쳤다.
낫을 내려놓고 배어낸 깻대들을 작은 단으로 지어 끈으로 묶은 후 혹시 내릴지도 모를 비를 피해 위해 원두막 안에 차곡차곡 세워 건조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가을햇살이 제법 따갑다.
그 동안 들깨들과 영역다툼을 했던 울금들에게서 생기가 넘친다.
얼마 남지 않은 들깨수확은 옆지기에 맡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을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배추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2주전 3포기의 배추가 시들시들하며 축 쳐진 모습을 발견했다.
성장이 뒤쳐진 이것들을 뽑아들고 뿌리를 살펴보니 뿌리에 혹 같은 것이 발생해 있었다.
마땅한 치료약도 없다는 배추 무사마귀병(뿌리혹병)에 대한 공포심에 지난 2주내내 마음 고생했는데 막상 천천히 들여다본 배추밭엔 다행히 병들어 시들시들 하는 포기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또 2주전에 관찰됐던 민달팽이도 계속된 가을가뭄의 영향인 듯 확산을 멈추고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다.
한 참 결구가 진행 중인 배추에서 발생하는 잎 끝이 말라 타 들어가는 증상이 보이질 않는 것으로 봐 칼슘부족에서 오는 생리장해는 이식 전 충분히 뿌려준 석회비료 덕에 염려를 덜 수 있어 보인다.
가뭄으로 부족해진 수분을 보충해 주기 위해 물을 퍼 날났다.
나방들만 몇 마리 관찰될 뿐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질 않는다.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땀 흘린 만큼 풍성한 결실을 맛보았다.
살아가는 과정은 굴곡 많은 곡선이란다.
뿌듯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교차된다.
비록 머무른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머문 보람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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