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보내는 편지 한 장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2008년의 한 해가 가는 12월이다. 2008년은 영원히 과거 속으로 묻힌 시간이자 세월로써 다시 살아날 수 없는 흔적들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건만 올 한 해만은 외로운 섬에 홀로 선 등대처럼 영원히 꺼지거나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한 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도 하다. 그런 올 한 해의 끝머리에 섰건만 어디선가 접동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이다.
“접동접동 애오라지 접동…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누나는, 진두강 가람가에 와서 웁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하는 소월의 시만큼이나 애절함을 토해내는 접동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환청을 지울 수가 없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와서 머물다 떠나버린 당신 한 생의 목소리가 귓전을 자꾸 맴돌고 있다. 내 시름을 당신의 시름으로 여겨 덜어 주되 기쁨 또한 보태어 함께 갖자던 당신의 목소리, 시력 약해질 때 바늘귀에 대신 실 꿰어 주고 쇠약해진 몸 서로 등 기대주며 살자던 당신은 지금 왜 그렇게 혼자 말없이 누워만 있소?
언젠가 햇볕 좋은 날 한갓진 전원에서 마음의 친구로서 따사로운 정 되새김질하며 두충차 한 잔 같이 하던 그대여. 초봄이면 씨앗 뿌리고 여름밤엔 모깃불 피워 밤벌레 쫓던 추억도, 가을이면 달빛 벗 삼아 책 읽고, 겨울 밤 눈 내리면 친구 맞아 손수 가꿔 거둔 것들로 음식 장만하여 먹고 마심 그렇게도 좋아하며 다 함께 기쁨 나누던 당신이 아니었소.
낯선 사람으로 만나 낯 익혀 한 몸, 한 마음 되어 살아온 반 세기. 서로 기쁨 주고 고뇌 나누며 살아온 지난날들. 달빛 내리는 고샅 밖 쓰르라미 소리만 멈춰도 내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임을 금세 알아차리던 당신. 뻗어간 세월 휘저어 돌아온 삶의 경륜에서 스스로 터득한 당신 특유의 정감을 내 어찌 모르리오.
언제나 부정보다 긍정만으로 살면서 나보다 옆 사람을 더 아끼던 당신은 이제 저 하얀 억새꽃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과 더불어 접동새가 되어 당신 혼자 노래하고 있단 말이오.
한 권의 소설책만으로도 남을 당신의 이승 이야기는 이제 모두 접어 두고 말없이, 소리 없이 당신 혼자 아침 햇살 번져 드는 양지 바른 묘원에 그렇게 호젓이 누워만 있는 거요?
문득문득 사과꽃 향기 짙던 윤사월이 생각나네요. 아침나절 바람 부는 시각이면 유난스럽게 반짝이는 사과나무 잎사귀 사이로 흐드러지게 핀 사과꽃에는 벌들이 분주했고, 한가한 낮닭의 울음 속에 산허리에 걸린 봄하늘 밑 흰 구름에 시선을 던진 채 일하던 손 멈추고 송골거리는 이마의 땀방울 훔치던 당신의 모습은 진정 농부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니었나 싶었소. 팔자에도 없던 산촌의 농장을 가꾸면서도 마냥 행복해 했던 당신이 아니었소.
사방을 돌아보면 가득히 널린 풍성한 봄은 겨울 추위에 호되게 매 맞은 나뭇가지마다 내리쬐는 두꺼운 햇살과 열기로 새 생명을 돋아나게 함을 발견하고 “대자연의 신비와 이치와 위대함”에 대한 탄성을 지르며 그런 자연과 동화되어 살 수 있음에 행복하다던 당신이 지금은 왜 그리도 말이 없소.
언젠가 우리가 나란히 유럽에 갔을 때였지요.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두오모 성당에서는 삶보다 죽음이 더 위대하다 기도 했고, 북미의 나라 캐나다의 내륙호 심코 호반에서는 황홀한 낙조를 보고 인생의 종말이 불타는 저녁놀처럼 아름답기를 바랐던 당신이 아니었소. 설령 당신의 병이 죽음을 부른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닌 영원한 삶이 될 것이라 여기오. 하기야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만 있다면 한 백 년 더 살아 못 다한 사랑, 믿음, 소망 함께 하며 살기를 원하였소. 당신의 건강이 하루 속히 회복돼서 우리 아들 삼형제 건실하게 사는 모습 돌아보며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기 그 얼마였소.
어제는 잠시 우리 함께 가꾸던 농장도 둘러보고, 분양 받아 살아온 아파트도 돌아보고 왔소.
산촌의 농장에는 구석구석마다 당신 손길 안 간 곳이 없더군요. 당신과 함께 거처하던 산장에는 자질구레한 살림도구 하나하나에 이름과 용도를 써 붙여 놓은 걸 보고 가슴이 메어지더군요. 아파트에도 마찬가지였소. 옷가지며 양말, 부엌도구 모두에도 당신 없을 때 내가 쉽게 찾아 쓸 수 있게 가지런히 정리를 해놓고 물건마다 사용설명까지 써 붙여 놓았더군요. 심지어 깨소금, 고춧가루, 간장, 된장까지…. 그리고 병상일지도 들여다보았소. “오늘 병원에 갔더니 주치의 선생님이 ‘건강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라든지, “이질 내외들이 여럿 다녀갔다. 반가웠다.”, “약은 거르지 않고 명심해서 잘 먹고 있다.”, “시애틀에 가 사는 둘째, 셋째 내외가 모두 전화 주어서 장시간 통화했다. 점차 회복되고 있으니 걱정 말라 당부했다.” 등 하루하루의 기록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방울로 책갈피를 얼룩지게 했소. 당신같이 착하고 열심히 산 사람이 오래오래 살아야 할 것인데 뭐가 그리도 급해서 서둘러 떠나가오.
“…/ 이승이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너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라는 내 은사 박목월 님의 시 「이별」이 12월 바람결에 밀려와 내 귀에, 아니 가슴으로 파고드오.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아무리 인연이 갈밭을 스쳐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연줄인데, 하직을 말아야지, 말아야 되고말고. 당신과 내가 어떻게 만난 인연인데. 진정 하직은 말아야지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오.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분수지. 당신이 먼저 떠나다니.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모든 이웃을 위해 베풀기만 하고 받기를 한사코 사양하며 살아온 당신. 끝내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심지어 육신마저 한 줌의 재로 남기고 그 고고한 정신만으로 하늘나라에 가셨구려.
그래, 거기서 기다리시구려. 내 언젠가는 당신 곁으로 가리다. 당신 가고 없는 빈 뜨락에는 은회색 안개 서린 운무가 겨울을 재촉하고 있소. 이렇게 썰렁한 이승보다는 평화롭고 행복한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지내시구려. 접동새의 울음이 흡사 당신의 목소리로 들리기에 문득 이렇게 당신을 그리며 12월을 못 보내고 간 당신에게 편지 한 장 띄우오. 서로 만날 그날까지 안녕, 그리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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