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지쳐 단풍 들 때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풀잎에 내린 아침 이슬이 차갑다. 날마다 조금씩 사물의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옷소매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진다. 구름 없는 날이건만 엷어져가는 햇살 속에 서늘한 바람기와 더불어 낙엽처럼 나부끼는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계절, 그 가을이 예년이나 다를 바 없이 이곳 산촌에도 익어 간다.
온통 여름의 한 계절은 초록의 세상이더니만 그것도 지쳐 이젠 단풍으로 물이 들었다. 그야말로 ‘초록은 지쳐 단풍 든다.’는 서정주 님의 시구처럼 눈 가는 곳의 만산에는 벌써 홍엽으로 물들었다.
올려다보이는 쪽빛 하늘은 구만리도 더 멀어 보이는데 스산한 바람 속에서 가을은 눈시울에 와 젖는다. 그러고는 애상의 모습으로 이별이 유난스럽게 다가온다.
꽃 지고, 낙엽 지고, 철새 가고, 바람 가고, 구름 가고, 그리고 우리의 청춘과도 이별이다. 그래서 모두가 이별의 계절이 된다. 이별은 서럽다. 이별이 있는 곳에는 휑하게 텅 빈 공간만 남는다. 쓸쓸함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 쓸쓸함의 공간에서 간신히 견디면서 사는 것이 현대인에게 주어진 삶의 실존인 것일까?
성급하게도 벌써 벚나무 가지가 그렇고, 은행나무 가지가 잎새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다.
넓은 밭이랑은 여름 내내 덮고 있던 초록이 거두어지고 참새떼만 폴폴거리며 날고 앉는다.
지친 초록과의 이별은 곧이어 회색빛 겨울과의 만남이 되겠지만, 그 만남이 있기 전에 먼저 어디론가 떠남이 앞섬을 어찌 하랴. 이런 때 나도 시나브로 일상의 삶과 더불어 가을을 앓게 되고 여행의 충동을 받게 된다. 먼 곳을 언제나 꿈꾸고 갈망했던 보들레르는 ‘어디로 어디로라도’라고 여행의 유혹에 빠지곤 했다. 플로베르 역시 프랑스에서만의 삶이 지겨워 “사하라의 사막에서 낙타를 몰며 올리브빛 피부의 여인과 첫사랑을 해보는 것이 유일한 꿈”이라며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토록 여행은 육체와 정신은 물론 지적인 즐거움까지 맛볼 수 있으므로 단순한 떠남의 의미가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과 달콤한 꿈과 실질적인 자유와 혼자만의 고독을 만끽할 수 있는 한 삶의 방식으로 일상의 권태도, 갈증도 털어 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흔히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한 행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누구가 죽기 위해 태어났으며, 어느 누구가 죽기 위해 살고 있겠는가. 만남 역시 헤어지려고 만난 것이 아니듯이. 죽을 줄 알면서도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헤어짐 역시 참된 만남의 완성이라는 말도 있다. 떠남 역시 돌아옴을 의미한다.
촘촘히 살아온 세월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때도 가을이요, 가을이기에 여행은 더욱 의미를 갖는다. 초록이 단풍 들어도 내년 봄이면 다시 초록으로 되돌아오듯이 떠남은 곧 돌아옴을 의미하기에 지친 산촌을 잠시 두고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떠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행 속에서 열심히 살았던 행복과 뜨겁게 사랑했던 자신의 정체를 되새김질해 보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이 가을 이렇게 이별과 만남과 떠남에서 고단한 이력과 삶의 일상이 묻어날 때 내면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기회도 되리라.
초록이 지쳐 단풍 들 듯 나에게도 언젠가부터 삶에 지친 일상에서 가을이 올 때마다 보헤미안이 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곤 한다. 그래서 요 몇 년 간은 계획도, 여정도 없는 여행을 떠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평양 연안의 북부지방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시애틀에 갔을 때다. 캐스케이트 산맥에 연이은 퓨젯 해협의 엘리옷 만(灣)을 바라보았을 때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찌든 삶들이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의 파도와 바람에 씻기고 푸짐한 햇살에 묻혀 버렸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찰싹이는 물보라를 밟으면서 해변의 모래톱을 거니노라면 마치 열정이 파도치던 젊은 날의 꿈이 되살아나듯 긴장이 되기도 했었다.
또한 북미의 나라 캐나다는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내가 가 본 리치몬드나 오로라는 길길이 뻗어간 단풍나무 가로수가 가을 풍경을 수놓아 그 아름다운 정취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또한 저녁 햇살이 엷어지자 서늘한 바람기가 고개를 숙이면서 출렁이던 호수가 수면에 떨어지는 붉은 낙조를 데불고 조용히 잠을 청한다.
이 때쯤 해서 호숫가를 거닐고 가로숫길을 달리면 장밋빛 꿈이 현실로 다가서면서 어제의 고통과 슬픔은 사라지고, 진정으로 살아온 인내의 삶에 대한 행복과 보람을 만끽하게 된다. 이런 것은 아마 가을을 앓고 여행을 떠나 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경지일 게다.
낙엽이 뚝뚝 듣는 가을 어느 날 60년 만에 처음 만나는 고향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도 문득 가을을 앓다가 바람 편에 소식 듣고 그저 무턱대고 찾아왔다고 했다. 은행잎 우수수 떨어지는 평상에 앉아 박주 일배를 권하자 잔을 든 채로 그가 말했다.
“나이 드니 정말 할 일이 너무 없어. 할 일을 못하니 가을을 맞이할 때마다 서글픔과 이별과 절망이 앞서는 거야. 아니 인생이 없어. 아무리 지금의 고통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해도, 아무리 열심히 살고 뜨겁게 살아 눈물 흘리지 말자 해도 거기엔 이미 인생이 없는 거야. 그저 하는 짓이라고는 수락산역에서 무임승차로 두어 시간을 무료히 보내고 나면 천안역에 내리는 거지. 거기서 병천에 들러 순대 한 점 사먹으면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것이 가을이면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과요 인생의 전부야.”
한때 중앙부처의 고급 관리로 잘 나갔던 친구가 60이 넘으면서 학력도, 명성도, 경력도, 능력도, 건강도 모두 평준화된 이 마당에 소소히 부는 가을바람 타고 내가 사는 산촌으로 나들이를 나온 것이란다.
“그래, 잘 했군 잘 했어. 당장 내일부터 시작해 봄세. 고구마는 캐서 마대에 담고, 무랑 배추는 뽑아서 땅에 묻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이랑마다 너울거리는 폐비닐은 걷고, 고춧대는 뽑아서 태워야 해.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과수의 밑동에다 퇴비를 뿌려주고, 배, 복숭아, 사과나무 가지는 전지를 해야 돼. 그리고….”
초록이 지쳐 단풍 든 산촌의 가을 마당에 기울어 가는 하오의 햇살이 두 사람의 어깨 위에 빼곡히 내려 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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