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추야(梧桐秋夜) 달이 밝아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이제 엷어져가는 햇볕 속에 가을이 여물어가면서 그늘 지워 햇살 가려주던 오동잎도 한두어 개씩 낙엽되어 떨어진다.
그 낙엽되어 나부끼는 오동잎을 볼 때마다 파도처럼 출렁이다 가버린 세월 속에 묻힌 아름다운 추억도, 후회와 그리움도 가슴 가득 고여 든다. 어떻게 살아왔는지조차 알길 없는 한 시대, 한 시절이사 접어둔다손치더라도 그 때 그 순간마다 내가 남겨놓은 발자국들의 의미가 새삼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돌아보면 어떤 것은 후회스럽기도 하고 어떤 것은 황홀한 행복의 순간이었기도 해서이다.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누려오기보다는 고통과 후회스러움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생을 살면서 만족하게만 산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만족은 현재에만 있고 후회는 과거와 미래에 있다. 후회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의 잘못을 되돌아보아 반성하고 아쉬워하게 되며, 그리하여 미래에 대하여 변화와 발전의 계기로 삼게 된다. 사회심리학자 닐로즈도 “후회는 유익하고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후회는 낙망과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 말고 즐기라”고 했다. 그러기에 지나온 추억에 담긴 것은 모두가 그리움으로 고인다. 그것이 후회든, 행복이든 간에.
올 여름은 예년에 비해 그렇게 무덥지도, 지루한 장마도 없었다. 그러면서 소리 없이 가을로 성큼 다가선다. 이십 사 절기 중 한로(寒露), 상강(霜降)이 든 시월은 개울물에 손을 담그면 손끝이 제법 시리다. 아직도 아지랑이 하늘거리는 봄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어느 사이 봄, 여름이 한꺼번에 가고 가을이 왔다. 아, 참으로 세월감이 화살 같구나. 미각지당 춘추몽(未覺池塘 春秋夢)인데, 계전오엽 이추성(階前梧葉 已秋聲)이라는 7언 절구의 한시(漢詩)가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절감케 한다.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뜰에 심은 오동나무가 무성히도 자라 한여름 내내 따가운 햇볕을 가려 주더니 가을에 접어들면서는 소소한 달빛 받아 추야의 정치를 더해 준다. 이제 막 떠오른 보드라운 달빛이 오동나무 가지에 외롭게 걸려 있다.
혼자 가만히 뜰에 나서 가을밤 만월 걸린 오동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태곳적 고요함에 넋을 잃는다. 그 고요함에서 인생살이를 반추해 본다. 사람마다 제 나름대로들 산다고는 하나 어찌 그들의 삶이 제멋대로 진행될 것이며, 질서와 리듬 없는 삶이 있을 수 있을 것이던가.
아직도 한여름 내내 햇볕에 달구어진 주변 곳곳의 잔서는 불어오는 산들바람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이런 가을밤에 오동나무 아래서 달빛 받고 앉아 있으면 과일 익고 벌어 터지는 소리가 싱그럽다. 산들바람은 야생의 모든 가을향기들을 몰고 와 내 주변에다 뿌려 놓고 간다. 산들바람은 가을 향기뿐 아니라 나의 삶에 인생의 향기를 뿌려준 은인의 향기도 함께 묻혀준다.
한평생 살아오는 동안 내게 도움 주고 이끌어준 분들이 한두 분이겠는가만 그 중에서도 부모님 빼고는 첫손 꼽을 내 삶의 등대수가 돼 준 한 분을 들라면 대천산업의 노상만 회장을 첫손 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정직하며 신용을 생명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사치를 모른다. 또한 부지런키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다. 그런 천성적인 성품으로 초지일관 변함없이 살아와 이젠 미수(米壽)를 눈앞에 두었지만 아직도 노익장으로 사는 현역 CEO다. 그는 언제 누구를 만나도 다정다감하고 해박한 지식과 가식 없는 생활 태도, 지켜야 할 예절, 그 하나하나가 알싸한 풀냄새처럼 싱그럽게 다가와 언제나 내 삶의 귀감이 돼 주었다.
세상의 가슴 할퀴는 소리와 독기 서린 언어와, 그래서 상처 받고 소심해 움츠러든 나의 일상을 소리 없이 만져주고 격려해 준 분이기에 상쾌하면서도 감미로움을 주는 돔페리뇽의 샴페인이 아니면 영양분 많고 노폐물 걸려낸 녹차의 향기로 내 가슴에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는 분이다.
그와의 만남에서는 언제나 황실장미 다기에 모락모락 실오라기 김이 피어오르는 설록차 한 잔을 내놓을지언정, ‘온더록’이나 ‘본차이나’잔에 우린 ‘보이차’ 같은 사치스런 대접은 하지도, 받지도 못했다.
지금부터 사십여 년 전 임진강변에 있는 불모지 야산 수만㎡를 구입해 잣나무 심어 놓고 주말마다 손수 가지치고 제초해서 조림하는 근면함이나, 8남매 잘 길러 놓아 성장한 그들은 석·박사로, 교수, 금융인, 실업가 등 기라성처럼 활동하고 있거니와 그 중 장남인 노찬 씨는 현재 외환은행 부행장이다. 그럼에도 노 회장은 춘하 한결 회사 출근을 자전거로 통근한다.
어느 날 노 회장이 내가 드린 편지에 답신을 주신 바 그 내용 가운데는 건강법도 적혀 있었다. 그 첫째가 화내지 말 것. 둘째로 넘어지지 말 것. 셋째는 감기 들지 말 것이라 적었다. 어떤 수식어도, 화려한 용어도 없는, 소박하고 단순한 건강법 세 가지는 언뜻 보면 웃음이 절로 나겠지만, 가만히 곱씹어 생각하면 그처럼 훌륭한 건강법이 더는 없다 싶을 정도다. 노년기의 나에겐 감기가 만병의 근원이겠고,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그 무엇보다 조심할 일이며, 밀고 밟고 당기고 쓰러뜨리는 요지경 같은 세상 속에 어찌 화내지 않고 살 수 있을까만 참아서 화내지 않는다면 스트레스 받지 않으니 그 또한 건강법의 제일이 아닐까 여겨서다.
아, 그런 분이 있었기에 나는 행복하게 사노라고 말하고 싶다.
산 넘고 들 건너 이곳 산마을까지 달려온 추풍이 싣고 온 소식들은 오늘 따라 짚불처럼 사그라지려던 옛 기억을 이렇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음성읍 외진 구석에 삼간초옥 마련해 먼지 털고 거미줄 걷어 사는 우거(寓居)의 주변에는 붉게 물든 대추, 사과가 주저리 매달리고, 볼 붉은 감, 때깔 좋은 배가 탐스럽게 익었는데, 산비둘기 구구거리는 산촌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아기우산만한 오동 한 잎이 찬이슬 받아 주느라 머리 위에 내려앉는데… 그래서 달빛 떨어지는 가을밤은 쓰르라미 울음소리와 더불어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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