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보다 반달이, 꽃송이보다 꽃망울이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9월은 그야말로 쟁반 같은 둥근 달이 동산에서 불끈 솟는, 한가위 명절이 있는 달이다. 따가웁던 한낮의 햇살도 시원하고 맑은 솔바람 한 점에 밀려나고 일몰과 함께 어둠이 엷게 산촌마을을 덮을 무렵이면 수리봉 능선에 둥근 달이 솟는다.
그렇게 솟은 밝고 큰 달은 역시 공해 없는 산촌이어야 볼 수 있고, 그 달에서 느끼는 뉘앙스 또한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때가 되면 오곡백과는 산자락, 밭뙈기마다 풍성히도 영글어 가고, 한가위 명절을 맞아 외지로 떠나 살던 자식 손자들이 선물 꾸러미를 들고 산촌을 찾아들기 일쑤라 조용했던 산촌도 시끌벅적해진다.
밀물이 밀어닥친 선창만큼이나 소란스럽고 수선스럽다.
어린 손자 손녀들은 매미채를 치켜들고 달을 따겠다고 뒷동산을 오르고, 모처럼 둘러앉은 평상에는 부자고부(父子姑婦) 간의 주고받는 대화가 정겹다.
평상에는 휘영청 밝은 달빛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얘들아, 마당 끝 수박등일랑 끄거라. 달빛 끄슬겠다.”
평생 절약으로 살아온 시어머니는 내심을 감추고 한다는 소리가 달빛 그을지 말라는 당부다.
“그래요. 참으로 밝은 달이네요.”
며늘아기가 수박등을 끄러가자 아들도 한 마디 거든다.
“꼭 일 년 만에 보는 달이에요.”
“그럴 테지. 항상 시간에 쫓기면서, 일에 밀리면서 어찌 달뿐이랴, 해도 제대로 볼 수 있었겠니?”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애정 담긴 말이지만 자기의 살아온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랬다. 직장을 오가고, 자식들을 돌보고, 사람을 만나고, 가정을 꾸려가고···.그렇게 바쁜 생활을 하다보니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노예가 되어 시간에 얽매이고 구속된 자유 속에 살아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슬픈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모자라고, 그래서 빌딩숲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아니면 방 안에서 허둥거리고 바둥대다 보니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가버리고, 아니 한 달이 일 년이 그렇게 가더니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르고만 나다.
아들의 “작년에 보았던 달을 꼭 일 년 만에야 볼 수 있네요” 하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림은 누구에게나 푸른 하늘을 이고도 그것을 바로 쳐다볼 겨를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행이 아닐까 여겨서다.
그래서 때늦게나마 이렇게 산촌에 묻혀 살면서 텃밭 가꾸고 책 읽고 글 쓰되 망중한(忙中閑) 속에 정신적 여유를 찾고자 노력해 보는 것이다. 그런 여유로움으로 달을 바라본다.
“동무들아 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 들고 망태 들고 뒷동산으로···.”
꼬맹이들이 부르는 동요가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유심히 달을 쳐다본다. 보름달이다. 보름달은 꽉 찬 둥근 달이다. 나는 만월(滿月)을 볼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든가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말이 있다시피 ‘활짝 핀 꽃’은 십 일도 못 가 낙화하는 슬픔이 있고, ‘꽉 찬 둥근 달’은 곧 이지러질 서글픔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만월이나 만개한 꽃과 더불어 잔에 가득 찬 물을 보거나 공부나 달리기에서 일 등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물론 성취감이나 자아실현에 대한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겠지만, 목표 도달의 정점에 이른 쾌감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고 그 정점을 향한 과정과 도전과 끈질긴 노력이야말로 인생 본연의 삶이 아닐까 여겨서이다.
나는 어느 해 집 근처 채전머리에다 66~99㎡(20~30평)쯤의 저수지(貯水池) 하나를 파놓고 수련 몇 포기를 심은 다음 물을 넣기 시작했다.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에 PVC 관을 연결해 놓았더니 수도관의 물줄기만큼이나 흘러들었다. 저수지에는 물이 날마다 몇 센티미터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물이 차오른 연못에다 비단잉어 치어를 구해다 넣었다. 아름다운 빛깔의 비단잉어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보며 연못에 물이 가득차기를 기다렸다.
매일 조금씩 조금씩 물은 불어 올랐다. 물이 하루 빨리 연못에 가득 차기를 기다리며 틈날 때마다 연못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는 동안 어느 날 물은 연못에 가득 찼고 넘쳤다. 이제까지 연못을 채워 줄 물로서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고 쓸모없는 물로서 넘쳐나 사라질 뿐이었다. 물이 차오르는 기대감을 더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의 허탈감은 마치 잘 가고 있던 수레에서 바퀴 하나가 빠져 달아나 버린 기분이었다.
이처럼 인생의 길에는 완성보다 미완이 더 소중하게 여겨질 때도 있게 된다.
늙은 내외가 사는 산촌에 언제 어느 날 자식들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올 거라 여기며 멀리 동구 앞을 내다보며 기다리는 마음이 행복하고, 씨앗 뿌려 그것이 싹트고 자라서 꽃 피우고 열매 영글기를 기다리며 사는 삶이 곧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삶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있어서 만족 뒤에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늙은이들의 호젓한 산촌생활에 친지들이 올 것이라는 기다림과 설레임 속에 맞이한 반가움과 기쁨이 파시장(波市場)처럼 출렁인 뒤에는 그들이 돌아간 자리에 허전함과 서운함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1등보다는 2등이 좋고 꽉 찬 것보다는 덜 채워진 것이 더 좋다. 활짝 핀 꽃보다는 꽃망울이 더 좋고, 능선(稜線)보다는 8부 능선이 더 좋다고나 할까. 꼭히 목표를 달성하거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목표나 목적지를 향해 중단 없는 전진을 계속하는 그 과정 자체가 참다운 삶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아갈 때 그저 덤덤하게 살거나 흐리멍텅하고 만사를 대수롭지 않게 산다거나 세상사 모두를 대충대충 넘기며 산다는 것 역시 무의미한 삶이겠지만, 반드시 목표 달성이나 완성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한 개인에게 주어진 생명은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그 귀중한 생명은 순간순간이 중요하고 귀한 것인바 각자가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성실하고도 차분하게 노력해 가는 그 과정 자체가 참다운 삶일 것이다. 인생은 어떤 목표에 대한 도전이지 완성과 성공은 없다. 만약 완성이 있고 성공이 있다면 그것이 곧 절망이요 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는 늘 갖고 있다. 만월보다 반달을, 활짝 핀 꽃보다 꽃망울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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