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향기가 짙게 묻어나는 다락골입니다.
떨어져 수북이 쌓인 밤꽃송이들이 마치 멍석을 깔아 놓은 듯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멍석위에 드러누워 토막잠이라도 즐기고 싶습니다. 

 

 

 

 

들풀에게 자리를 내준 땅을 되찾기 위해
작정하고 나선 날입니다.
두둑에 비닐을 씌우고 밭고랑에 부직포를 깔아 풀 뽑는 일은 많이 줄었지만
밭둑 주변과 봄철에 씨앗을 뿌려 싹이 돋아난 도라지와 수리취 밭이 말썽입니다.
장맛비가 계속되고
고온다습한 생육환경이 조성되면 잡초들은 혈기왕성한 모습으로 온 밭뙈기에 빈틈없이
들어 찰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벌써 도라지 어린새싹은 바랭이에 치여
숨도 재대로 내쉬지 못하고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지느냐, 이기느냐.
포기를 하느냐, 마느냐.
선택해야할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산자락을 따라 길게  산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밭뙈기가 어둠에 묻히고 나서야 호밋자루를 내팽개치고 쉼터로 기어듭니다.

 

 

더디게 싹이 올라오던 울금밭엔
마지막 남은 빈자리에 싹이 움텄습니다.
가뭄으로 힘들어하던 야콘들도 기운을 차렸습니다.
순백색의 "사두오이꽃"에 카메라 앵글을 맞춥니다.
이른 새벽 해맑은 모습들만 카메라에 옮겨 담고
끝장을 보려는 듯 오기에 가득 찬 모습으로
호밋자루를 챙겨들고 쪼그리고 앉은 지 꽤 여러 시간이 지났습니다.
유월답지 않게 "덮다"는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연거푸 세어 나옵니다.
땀으로 밴 옷가지에선 쉰 냄새만 베어납니다.
깔끔 떠는 옆지기에게 이런 모습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되니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스칩니다.
어린 새싹 속에서 진을 친 들풀들만 골라 뽑아내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가 요구되는 작업입니다.
어린생명이 다치지는 않을까?
호미질도 재대로 할 수 없고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조심조심 잡초들만 뽑아내다보니
손톱 끝은 새까맣게 물이 들고 아프기도 합니다.
자칫 잘못해서 잡초사이에 끼여
따라 뽑히는 어린 싹이 발견될 때면 제살이 찢기는 아픔도 감내합니다.
이것이 무슨 할 짓이라고.......
호밋자루를 집어던지고 시원한 그늘 밑에서 놀고픈 충동질을 참아내기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 아저씨, 혼자 오셨구먼유?
얼른 우리 집에 건너가서 점심이나 같이 먹어유!"

 

"집사람이 일이 있어 저 혼자 내려왔습니다.
아침에 해 놓은 밥이 그대로 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디 편찮으세요?"

 

이웃집할머니가 건너오셨습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무척 수척해보입니다.
벌써 점심 무렵인가 봅니다.
잡초들을 들춰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 아저씨, 나 어저께 병원에 갔다 왔시유.
무릎팍에 물이 차서 주사기로 물을 뺏구먼유......"

하시며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쪽 무릎을 보여줍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이 아파하시는 모습과 똑 같습니다.
자식새끼 잘 되기만을 염원하며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허구한 날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던 어머니들의 뼛속 깊이 파고 든 골병의 상처입니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겪는
아픔을 애써 감추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쓰시는 모습이 떠올라
괜히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가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밭뙈기 아래쪽에 있는 샘물이 바닥을 보입니다.
큰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아 예전에는 동내 공동우물로 이용되었던 샘입니다.
물이 줄어든 틈을 이용 샘물이 흘러가는 물길을 정비하여
소담한 미나리 밭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씨앗만 뿌려놓는다고 해서 곡식이 여무는 것은 아닙니다.
양쪽어깨위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일한 탓에
승용차 가속페달에도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오고 있기에
마음만은 가볍고 후련합니다.
늦은 밤 인천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로 여우비가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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