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나 저제나 하고 진즉부터 애가 탔습니다.
심각하다는 기별은 받았습니다만 예상했던 것보다 현실은 암울합니다.
무엇부터 손을 써야할지 막막합니다.
태풍 ‘고마스’가 부린 광기는 한적한 산골마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쓰러지고 꺾이고 찢어지고 심지어 뿌리째 뽑혀나갔습니다.
"팔십 평생 생전 이런 바람은 처음이구먼유.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걱정이네유!"
가을 문턱에서 시름에 지친 이웃집할머니가 애써 지은 미소 뒤에는 팍팍하고 우울한 표정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살던 고향집은 태풍의 길목에 위치한 섬마을입니다.
그래서 늘 태풍의 손아귀에서 갇혀 지냈습니다.
그중에서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무렵에 휘몰아쳤던 ‘밀리호’라는 태풍의 악몽 속에서 지금도 갇혀 삽니다.
한밤중에 불어 닥친 태풍은 초가지붕을 날려 보냈고 밤새 퍼부었던 빗줄기는 토담을 무너뜨려 끝내 집을 주저앉게 만들었습니다.
새로 집을 짓는 목수들에게 하나 남은 행랑채 방을 내주고 식구들은 부엌에 멍석을 깔고 생활했던 기억,

목수의 일을 거들던 부친께서 서툰 솜씨로 연장을 다루다가 도끼로 발목을 크게 다쳐 누워 계셨던 모습,
남의 리어카를 빌려 그 위에 통나무를 싣고 읍내 제재소까지 20여리 길을 끌고 밀며 흘렸던 땀,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집안일을 거든다고 두 달 가까이 학교를 가지 못했던 슬픔만큼이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참담합니다.

 

 

매실나무는 넘어갔고
부러진 은행나무가지 밑엔 설익은 은행 알이 수북합니다.
때깔 좋은 세물고추를 수확하는 옆지기 얼굴엔 기쁨보다 수심만 가득합니다.
집집마다 한 두동씩 가지고 있던 비닐하우스가 모두 비닐이 찢겨지거나 무너졌습니다.
또 다른 태풍이 눈앞까지 접근했다는 특보가 계속해서 전해집니다.
애써 키운 것을 그냥 내다 버릴 수도 없고 집에 가져가 말릴 수 있는 양은 훨씬 초과해버렸습니다.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난감합니다.
마음에 굳은살이 박이면 감동하는 것도 감동받는 것도 무감각일 텐데
밤새 자기 일처럼 이 마을 저 마을로 전화를 걸어 애써주신 이웃집 덕에
윗마을에 있는 고추건조기 속에 물고추가 들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을 덜어냅니다.

 


뙤약볕 아래서 병치레 없이 잘 자랐다고 엊그제까지만 해도 자랑했었는데 가을장마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혹하게 태풍까지 휘몰아쳤습니다.
크다고 좋은 건만 아니었습니다.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빠지면 일어서기라도 기대할 텐데 강풍에 대가 꺾인 들깨들이 속출했습니다.
한참 꽃망울이 맺히고 있는 중이라 매만지는 이의 마음은 더 우울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자식처럼 키운 것이기에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습니다.
쇠말뚝을 박고 줄을 띄워 일으켜 세웁니다.

 


"배추가 말라죽어요?
 왜 그렇죠?"

 

"뿌리를 내지지못했네유!
흙에 물기가 많아서 뿌리를 못 내리고 말라죽은것이네유!
요즘 배추밭을 2-3번 갈아엎은 집이 한두 집이 아니네유!
벌써부터 장사치들이 김장배추를 계약하러 다니구 있구먼유!
큰일이네유!"

 

뿌리를 내리지 못해 말라죽는 어린배추들이 여럿입니다.
이어짓기도 하지 않았고  뿌리혹병이나 뿌리마름병이 발병했던 적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혹시 발생할 수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위해 모종을 내다심을 때 "미리카트"에 침지한 후 이식한 터라 뚜렷한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급한 마음에 말라죽은 모종을 뽑아들고 달려간 종묘상에서도 불순한 날씨만 핑계될 뿐 이렀다할 해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종묘상엔 김장채소씨앗을 다시 구입하려온 농부들로 성시를 이룹니다.               

 


하늘을 원망했고 자신도 질책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클수록 그것을 만회하고픈 욕망과 초조함이 커집니다.

억누르고 힘겨울수록 한결같은 마음을 가져봅니다.

꺾인 의욕을 다시 세우려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비켜서지 않고 피하려들지 않았습니다.
힘껏 일했습니다.
비록 마무리를 다 짓지 못하고 짐을 챙깁니다.
조금씩 남기면 살아가는 것도 사람 사는 멋이구나!
태풍! 그 후 하루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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