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익어가는 계절의 축제에 취해보려는 인파들로 고속도로가 넘쳐난다.

가을이라 했더니 어느새 만월처럼 가득 차 있다 서서히 기울준비를 하고 있다.

토요일 오후 3시30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주행은 30분도 채 못가서 멈추어서 버리고 만다. 영동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가 만나는 안산분기점에서부터 차들로 가득하다. 지난주 가지 못하고 2주 만에 찾는 것이라 혹시 아프지나 않았는지, 먹을 것은 부족하지 않았는지…….온갖 환상 속에서 사무치게 밀려오는 그리움을 애써 다독이고 계절의 3번째 징검다리 가을 역에 발을 멈추고 있는 계절을 음미하니 일상생활에서 꼈던 마음의 때가 하나둘씩 밀리여 나간다. 비록 낙엽을 밟으며 계절의 정취를 느낄 순 없지만 고속도로 옆에 잘 가꾸어져 계절의 풍향계를 나타내던 모감주나무의 잎사귀가 그새 샛노란 단풍으로 치장하고 불어대는 바람에 하나 둘씩 떨어져 내린다.

노랑들국화가 보기 좋게 피었다 싶더니 금방이라도 깃털을 펼치고 날아오를 것 같은 억새꽃이 처연하게 나부끼고 있다.   흐르는 개울물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량의 흐름은 서팽택 분기점을 지나고 나서야 한결 여유로워진다. 석양이 짙어가는 서해대교 위에서 일몰의 광경을 목격하는 환희의 호사를 만끽한다. 갓길에 차를 정차할 시간도 없이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보지만 뚝뚝 떨어져 내리며 금세 서산에 모습을 숨기고 만다.

 

 

가을의 어둠은 삽시간에 밀려온다.

당진IC부근에서 정체되는 관계로 요금 소에서 도로 비를 정산하니 사방천지가 칠흑이다.

당진읍에 들려 간단히 배를 채우고 이틀쯤 기운 둥근달을 벗 삼아 한적하기도 한적한 비포장 길을 따라 다락골로 들어선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주인을 기다리다 지쳐 토라질 대로 토라져 잠에 빠졌나 보다.

자동차 전조등에 화들짝 깨어난 것처럼 부스스한 모습을 애써 감추려는 듯 고개만 빼곰히 쳐들고 주인을 반기는 듯하다.  전조등에 비추어진 모습에서 아직도 달팽이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어 속상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쉼터의 방문을 열고 형광등 등불을 켜니 귀뚜라미 몇 마리가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에게 놀란 양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망가기에 난리가 났다.


가을.

산자락의 밤은 빨리도 내리지만 서둘러 물러가지도 않는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떠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이다.

주변은 아직 어둠의 흔적이 남아 있다.

두툼한 털 스웨터를 챙겨 입고 원두막에 앉으니 찬 공기로 행동이 움츠려 든다.

배추밭엔 하얀 서리가 얇게 내려 있다.

2주 동안에 결구가 많이 진행되어 있다.

늘 푸를 것만 같았던 검은콩 밭도 점점 갈색으로 퇴색되어 가고 있다.

옆 밭의 누런 콩은 벌써 배어내어 건조작업이 진행 중인데, 서릴 맞으며 익어간다는 서리태의 정의를 실감할 수 있다.

검은콩 밭과 인접한 곳에 심은 배추에서 달팽이의 피해가 줄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아마 검은콩 밭 전체가 달팽이의 서식지인 것 같다.

수 없이 잡아 없앴는데도 계속 피해를 가하고 있다.

달팽이를 잡겠다고 콩밭을 다 멜 수도 없는 현실이고 보니 이젠 이놈들과 공생하는 법을 모색해야만 할 것 같다.

오다가다 길에 깐 경비가 얼마냐고 가끔은 생뚱맞은 바가지를 북북대지만 지금은 마니아로 변해버린 옆지기가 건네 준 따스한 커피 한 잔으로 속을 데우며 뒷동산에 처연하게 피어 있는 억새꽃을 감상하며 우리만의 가을의 운치를 즐긴다. 가끔 누런 은행들이 하나 둘씩 뚝뚝 떨어지고 미처 줍지 못한 은행들이 맨 땅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다.

 

초봄에 “곧은터사람들”을 통해 옮겨 심은 100여주의 당귀를 수확하려 계획된 날이다.

거름하나 주지 않고 농약한번 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재배한 것이라 내심 그 결과 몹시 궁금하다.

지난 주중에 미리 대장간에 들려 쇠스랑처럼 생긴 두발달린 도구와 한발달린 도구를 각각 하나씩 약초 캐는 도구를 구입했었다. 조심스레 흙을 걷어내고 한 뿌리 한 뿌리씩  캐어 낸다. 뿌리가 깊게 퍼져 있어 여간 힘이 든 게 아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옆지기가 호기심이 발동해서인지 자기도 한번 해 보고 싶다고 도구를 낚아 체더니 한 뿌리를 붙들고 발버둥 치다  이내 힘들다 포기하고 도구를 내팽개친다.

자기는 떨어진 은행이나 줍는다고 비닐 포대를 하나 챙겨 들고 은행나무 밑으로 발을 옮긴다.

밑이 실하게도 들었다.

덩치가 큰 것들은 1KG이 족히 넘어 보인다.

캐낸 것들은 순을 제거하고 높이 들었다 패당이 쳐 흙을 털어낸다.

상처가 난 뿌리에서 하얀 진액이 흘러 나와 손에 묻어 찐득거린다.

시골 장터 한약방에서 맡던 냄새가 온 사방에 퍼져 나간다.

“당귀농사는 대성공이다”은행 줍던  옆지기가 흥얼거린다.

“무슨 냄새가 이리 좋남?”

언제 건너오셨는지 아랫집어르신이 원두막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계신다.

“안녕하셨어요. 어젯저녁엔 길이 막혀 늦게 오는 바람에 인사도 못 드렸어요!

“배추가 참 잘 되었어!”

올 해는 날씨가 궂은 날이 많아 일조량 부족으로 늦게 심은 배추는 속이 차지 않은 것이

많을 것이라 하시며 올 김장채소 값이 예전에 비해 비쌀 것이라고 진단을 곁들이신다.

“할멈이 아침 준비했어, 건너가 서 같이 먹어.”

“어르신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지금 저희도 아침준비를 하고 있는걸요. 대접 받은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한사코 자기 집에 건너가 식사하자고 성화시다.

아침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계속 사양하니 이젠 양손을 잡아끌어 당기신다.

어르신의 호의를 너무 거절하기도 그래서 수확한 당귀를 한 움큼 안고 건너가니 언제 준비하셨는지 정성 가득 한 상 차려 놓으시고 우리 오길 기다리고 계신다. 지지난주에 베어내어 원두막에다 건조시켜 놓았던 들깨도 손수 털어 잡티까지 깨끗이 선별해 놓으셨다면 밥 먹고 들고 가라 마루에 내어 놓으신다. 또 우리가 고구마를 조금 심은 것 같다 하시며 고구마 한 포대와 알밤 한 자루 그리고 갓 수확한 생강도 한 움큼 내어 놓으신다.

코끝이 찡해오고 마음이 숙연해진다.

일주일에 한 번 내려와 가끔 말상대만 해 주었을 뿐인데…….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말문이 막혀 이침부터 차려주신 성찬에 반주로 건네주신 소주잔까지 곁들이니 마치 하늘을 걷는 기분이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에 꽃 게장, 도토리묵, 된장찌개, 갓김치, 파김치, 깻잎장아찌, 등 등 어릴 적 향수가 젖은 정갈한 음식들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려 노동의 질을 높여본다.

뿌리 사이에 끼여 있는 흙을 털어 내는 작업이 수월치가 않다.

덩치가 클수록 일이 더디게 진행된다.

커다란 다라이에 수확물을 가득 채우고 물로 씻어 가며 하나하나 칼로 긁어내고 솔로 닦아주며 작은 것은 발효효소용으로 큰 것은 건조용으로 선별하며 작업한다.

콧노래까지 불러 가면 흥에 겨워 솔로 싹싹 닦고 있는데  은행을 줍던 옆기지가 버럭 소리를 질러댄다.

“그 놈의 당귀에만 시간 다 허비할거에요?”

“나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왜요? 혼자하려드니 심심해서요?”

“심심하기는....... 오늘 길도 엄청 막힐 텐데, 빨리 끝내고 한시라도 빨리 올라갑시다.”

갑자기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크기가 큰 것은 끈으로 굴비 엮듯 엮어 원두막 중앙에 매달고 발효효소 담글 것은 반으로 갈라 수분을 건조시킨다.

지난 초여름에 담갔던 개복숭아 와 보리수열매 효소를 걸러내며 맛을 보니 향긋한 향과 진한 맛이 입안 가득하다.

 

일기예보와 괴를 같이 하려는 듯 오후3시를 조금 넘어선 시각에 하늘엔 먹구름이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후드득 찬비가 쏟아지고 바람도 새 차진다.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가을비가 굵은 장대비를 한바탕 퍼 부어 대더니 이내 잠잠해지고 잠잠해진다 했더니 또 내리고…….

작두콩도 따야하고 은행나무 밑에 차광막도 깔아야 하고…….

계획한 일을 마무리하기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돌아오는 고속도로위엔 예상했던 대로 차들로 가득하다.

달리는 시간보다 멈추어선 시간이 많아 보인다.

오르막이 있어 내리막도 있다.

조급증을 털어내니 마음이 가볍다.

인간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열심히 일했기에 마음만은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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