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의 그 한결같은 마음을 멋들어지게 노래하고 있는 국민가요 <님과 함께>의 한대목이다. 생각해 보자,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랑하는 님과 함께 소박하게 농사짓고 사는 일이라니! 가던 길 멈추고 상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노래야 모두가 즐겁지만, 그런 마음의 울림에 깊이 공명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귀농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실제 농사를 지으러 농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지경이다. 왜 그럴까?

귀농은 간단히 말해, 농(農)촌으로 돌아가는(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오해와 숨겨진 진실, 막막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그리움, 주변의 반대와 또 한편의 격려, 현실적 생존의 문제와 실존적 가치관의 문제 등등. 하나하나 확실히 짚어서 역으로 튼튼한 징검다리로 만들어야 할 문제들이 너무도 많다.

도시에서 귀농을 준비하는 단계를 포함해서, 실제 귀농을 해서도 필요한 덕목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은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짧고 부족한, 게다가 다소 과격한 길잡이일 뿐이다. 귀농이라는 아름다운 꿈이자 냉정한 현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길고 긴 과정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다. 어쨌든 수년간의 경험이 녹아든 결과물이고,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담은 글이기도 하다.


§ 귀농을 위한 몇가지 금언

● 귀농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텃밭농사-주말농사를 시작하라.

귀농을 해서 백평 농사를 하건 만평 농사를 하건, 무언가를 심고 거두게 될 것이다. 도시생활 내내 흙과 멀어진 채로 살다가, 귀농을 하면 그때 가서 거창하게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이라면 문제가 있다.

재를 묻혀서 심는 씨감자의 경험, 알이 맺히지 않는 배추농사의 경험은 부지런하면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건을 탓하지 말고 좀 멀어도 좋으니, 아이들과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보자. 옥상이 있다면 화분에 고추나 배추를 심어보자. 지하철에서 스포츠신문을 볼 때가 아니다. 영농서적을 외우듯이 읽어보자. 5평 농사의 풍성함을 만끽해 보자. 귀농의 필수조건이다.

● 준비 기간 동안 귀농교육을 받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으라.

도시에서 귀농 준비를 하는 순간 귀농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생태귀농학교에 참여하면 많은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얻게 된다. 간혹 귀농교육을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강의나 다른 이들의 사는 이야기보다는 내가 직접 부딪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농사만큼은 혼자서 되는 일이 없다. 농사는 원래 하늘이 짓는 것이고, 이웃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할 수도 없다. 하늘이든 이웃이든,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는 농사건 귀농이건 불가능하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귀농은 고달프기만 하다.

귀농과 관련된 정보나 영농정보도 넘쳐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인터넷 덕분에 정보의 홍수라, 오히려 옥석을 가리는 일이 더 힘들 지경이다. 그 중에 내가 원하는 정보만 집중해서 찾고 스크랩해 보자. 정작 귀농해서는 자료나 정보를 폭넓게 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 철을 좇아 사는 일로만 하루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준비하는 두툼한 자료뭉치는 분명히 큰 자산이 된다.

● 철학적 고민, 시대와 호흡하는 정신적인 무장이 중요하다.

철학적 고민이라니, 좀 생뚱맞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귀농은 삶의 전면적인 전환이다. 단순히 샐러리맨에서 농부로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의 생활양식이 농촌생활에 어울리게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무수한 철학적 고민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도시 친구들에게 감자 한 박스를 팔아보자.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그 친구는 나의 수고와 땀을 모른다. 감자가 알이 작다느니 남아서 썩었다느니, 속 썩는 이야기 듣기 십상이다. 어쩌다 생산을 많이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아볼라치면, 시장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농민들이 왜 수확 철에 더 속이 터지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게다가 수해나 태풍이라도 얻어맞으면? 그래도 나는 귀농을 행복하다 할 것인가? 그 때, 나의 준비된 철학, 단단한 가치관이 필요하다.

이 글 처음에 적은 노래가사에 나오는 저 푸른 초원도, 그림 같은 집이 서 있을 곳도,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의 농촌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농촌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다. 노래에 나오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의 농업 순환은, 다름 아닌 WTO 체제 아래의 한국농업 위의 순환이다.

귀농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는 시공을 초월한 순백의 종이가 아니다. 바로 오늘의 힘겨운 농촌과 무너져 가는 농업, 그 위에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민을 가서 농사짓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달리 생각하고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농업?농촌의 역사와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되, 애정을 가지고 해야한다.

● 귀농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라.

결론적으로, 귀농을 해서 도시생활과 같은 경제적 수준을 유지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자연이 주는 수많은 기쁨과 혜택이 또 다른 수입이다. 이걸 누릴 수 있으려면 앞서 말한 철학적 고민이 받쳐주어야 한다. 도시에서는 식의주와 건강문제, 교육문제에 들어가는 돈은 밑도 끝도 없다. 모두 돈과 맞바꾸어야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다르게 접근할 수 있고 풀 수 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하는 이야기들은 귀농본부에서 펴내는 계간지 <귀농통문>에 가득하다.

대체 자금이 얼마정도 있어야 귀농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물론 답은 없다. 그렇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할 때는, 몸 누일 집과 50평 텃밭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 이상은 옵션이다. 황토집을 짓든 시설농사를 하든 소를 키우든 그건 모두 옵션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웃는다. 전혀 웃을 일이 아닌데 말이다.

도시생활을 고스란히 이동한 귀농을 생각하면 자금은 수억이 들 것이다. 도시에서 바쁘게 일하던 것처럼 농촌에서도 일하려고 한다면, 우선 좀 멈추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귀농설계는 그곳에서 다시 해야한다. 물론, 도시에서의 설계도 필요하지만, 농촌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특히 땅 사는 일, 집 짓는 일은 되도록 천천히 신중하게. 귀농은 치킨집 신규창업과는 전혀 다르다. 속도와 경쟁이 아니라 느리게 천천히 사는 일이다. 자금을 많이 들이면, 그만큼 바빠지고 고달프다.

● 농사로 돈 벌 수 있다는 생각은 접어라.

간혹, 농업을 통한 성공사례가 소개된다. 부디 현혹되지 마시기를. 농사꾼 1~2%의 특출난 사례가 우리의 것이 되기는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꿈도 꾸지 않는 것이 건강에 좋다. 그런 분들의 경우,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 아니면, 정말 시기적절한 아이템이 있어야 한다. 귀농을 하려는 이들은 그 줄의 맨 끝에 서 있다.

농사는 투기가 아니다. 한탕으로 되는 농사는 없다. 사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귀농을 하지 않아야한다. 수십 년 유기농업을 하시는 선생님들 가라사대, 돈 버는 작물은 없다. 땀 흘린 만큼만 거두고 먹는다는 진리에만 충실하면 된다. 귀농을 해서는, 돈을 번다는 개념이 달라야한다. 자급자족만 할 수 있어도, 좀 거칠게 말하면 ‘시골에서 붙어 있을 수만 있어도’ 성공적인 귀농이라고, 귀농자들은 말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다면, 이를테면 소를 규모 있게 키우거나 시설작물 같은 것을 해보고 싶으시다면, 좀 천천히 바닥부터 일을 익힌 후에 투자를 하시라고 곡 말씀드리고 싶다. 프로 농사꾼들이 자기 노동을 최대한 들여서 농사지어도 될까말까 한 일이다. 농업은 계산 잘 해서 투자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며, 거기 내 땀이 깃들여야 한다.

농업소득에 관해서 유념할 일은 유통에 관한 문제이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제때 제값에 팔지 못하면 그만큼 허탈한 일이 없다. 귀농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유리한 면도 있다. 도시 연고를 잘 활용하면 되지만, 그게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유통망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 농민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작목반에 가입하거나, 유기농 생산자로 인정을 받아 생협이나 한살림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채우려면 게으를 수가 없다.

농사로 돈 버는 방법! 그 어떤 작목이든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능력이 있으면 가공을 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친지든 조직이든 든든한 유통망에 기대라는 말 외에 더 보탤 말은 없다.

● 농촌에는 농사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촌에서 직업을 이어가라.

귀농을 하게 되면 꼭 농사를 지어야 할까? 꼭 농사꾼이 되어야만 할까? 아니다. 농촌에는 농사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귀농도 농사를 지어야만 귀농은 아니다. 시골에서는 그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10평 채마밭 가꾸는 일은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예를 들면 더 좋을 것 같다. 우선 교사들은 그런 면에서는 유리하다. 부부 중의 한사람이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일을 하면 여러모로 수월한 법이다. 아내는 읍내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남편은 농사꾼으로 땀 흘리는 부부들도 있다. 남자들은 지역 내의 농업관련 활동을 전업으로 할 수도 있다. 영농조합법인이나 생산자공동체 사무 일을 보거나, 트럭을 몰고 배송을 하러 다니는 귀농자들도 있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지역 정보를 두루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여자들은 여성농업인센터 등에서 방과 후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면사무소에서 농민들 컴퓨터교육을 계약직으로 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 일들은 도시에서 일을 해 온 귀농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농번기에 품을 팔거나 산불감시원 등을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을 일원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아야 가능하고, 생활의 보조 수단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일들도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매이지 않고 자원봉사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몇 평 농사이든 평수는 상관없이, 역시 귀농은 역시 내 농사가 제 맛이다.

● 지역 관공서나 기관 및 조직을 적극 활용하라.

귀농을 지원하는 안정적인 지원시스템은 없다. 스스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 시골 면사무소는 도시의 동사무소와 같은 레벨이지만, 농촌생활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면사무소 직원과 통하면, 상당한 지역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농업기술센터의 역할도 무시 못 한다. 도시에서야 가급적 관공서 안 가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농촌은 관공서와 친해질수록 좋다. 실질적인 귀농자 지원 방안은 각 면 단위에서 쥐고 있다. 속된 말로 자꾸 찔러야 한다.

농촌의 특징은 무수한 민간조직이 있다는 것인데, 웬만한 촌부들은 이장이나 무슨무슨 모임 회장을 안 해본 분이 없다. 생활과 직결되는 작목반부터, 대체 무슨 일들을 하는지 알길 없는 동호회와 오래된 농촌조직들이 있다. 이를 활용할 수 있다면 정착에 도움이 된다. 후견인들을 얻는 것이다.

귀농자들은 붙박이 농민들과는 달라서, 좋은 교육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또 도시에서의 경험 때문에 무슨 박람회니 교육이니 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대충 알아본다. 근래에는 모든 군에서 친환경농업 육성을 과제로 삼고 있어서, 상당한 교육과 투자를 하기도 한다. 여기 잘 참여하고 활용하기만 해도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 있다.

● 귀농지 선정은 연고지와 인맥을 적극 활용하고 인내하라.

귀농지 선정만큼 막막한 일이 있을까 싶다. 심지어 지도를 펴고 눈감고 찍은 곳부터 돌아보았다는 분도 있다. 어디를 어떤 방식으로 다녀야 내 귀농지를 찾을 수 있을까.

고향으로 귀농을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고향을 피하는 이유야 알지만, 고향은 또 다른 면으로 품어주는 곳이다. 이제는 농촌 어르신들의 귀농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아는 귀농자가 있는 지역이면 좋다. 귀농자의 마음은 귀농자가 아는 법이다. 서로 의지할 수 있다. 그런데 꼭 주의할 점들이 있다. 우선, 귀농자라고 해서 나를 도와줄 의무는 없다. 그런데도 용케 인연을 얻어 귀농자와 함께 마을을 돌아보고 술 한잔 나누게 된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건만, 당장 내 목표가 급하다고, 그런 소중한 인연을 허술하게 생각하고 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한번 만난 귀농자와는 자주 안부도 묻고, 농산물도 앞장서서 팔아 주면서 더 깊이 만나기를 바란다. 행여 사귀기도 힘들고 할 이야기가 없을까 걱정 마시라. 농사 이야기만큼 사시사철 무궁무진한 주제가 어디 있으랴.

그 외 몇 가지 요령은 있다. 우선 대상 지역을 최대한 좁히는 것이 좋다. 하나의 군만 집중 공략하라. 지역 부동산정보지 같은 것도 활용하고, 면사무소 직원을 잘 만나면 같이 다니기도 한다. 마을 이장을 찾아갈 때는 빈손 말고 음료수 한 박스는 사들고 가기 바라고, 그 지역 토박이 농사꾼을 알면 제일 좋다. 귀농지를 찾는다고 차 몰고 다니는 마음이야 절절하지만, 시골 사람들 눈에는 부동산 투기하려는 사람과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땅값부터 묻는다든지 할 일이 아니다. 뭐 좀 있는 행세는 제발 하지 말기를.

우선 땅은 빌려서 농사를 짓기를 권하고 싶다. 마을 어른들은 한해 농사 하는 것 보고서야, 이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는 것인지 아닌지를 믿는다. 그러니 첫해 농사는 정말 열심히 해야한다.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다음부터는 농지를 빌려주겠다는 사람, 내 땅을 싸게 사라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년이면, 옆 마을이나 산너머 마을 정보도 얻게 된다. 사실 일개 면 범위의 정보면 충분하건만, 우리는 천여평 농지를 얻기 위해 전국을 헤매는 것이다.

땅을 사는 일과 집을 짓는 일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촌생활 속에서 얻는 정보는 살아있는 정보이다. 또, 살면서 내가 어떤 형태의 귀농을 할 것인가가 좀더 구체화되면, 농지와 집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많은 귀농자들이 거처를 옮긴다. 밀려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좋은 선택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귀농지를 찾는 일은 배필을 찾는 일과 같다. 아주 극적인 인연이다. 노력하는 필연과 하늘이 내리시는 우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내 맘에 꼭 맞는 귀농지는 없다. 직업상 수백 동네를 다녀 보았지만, 집과 농지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정말 기막힌 곳이라 생각한 집은 서너군데에 불과하다. 고향은 어디인가? 정들면 고향이다. 나의 귀농지는 어디인가? 정들면 그곳이 최고다.


§ 성공적인 귀농의 최후 비결

“귀농은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귀농을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성공적인 귀농의 최후 비결도 여기에 있다. 귀농과 전원생활의 차이도 여기에 있고, 귀농의 최종 목표도 여기에 있다. 그 마을 사람이 되는 것. 귀농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을 사람이 되기 위해 중요한 점은, 마을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몸과 마음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열쇠는 애정과 믿음에 있다. 농촌이라는 이름 안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에 대한 애정과 그 중에서도 농민에 대한 믿음. 결국 사람을 믿지 않으면, 귀농이고 뭐고 풀릴 일도 없다.

흙이야 늘 정직하다. 땀 흘린 만큼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내가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들이 내게 기대는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노력은 꼭 뿌린 대로 돌아오지는 않지만, 힘들지만, 즐거운 숙제이다. 그 과정이 귀농이다.

귀농! 정말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귀농이 힘든 이유는 역설적으로, 귀농이 그만큼 귀한 일이라서가 아닐까?

출처 : 시골로 간 꼬마
글쓴이 : 이명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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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준비,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준바된 귀농! 아름다운 삶의 전제조건-

귀농인이 생각하는 농촌은 목가적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는 곳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생활에 불편을 주는 제약 조건이 많이 있다. 때문에 농촌의 실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오늘날의 농업 여건은 생각 보다 복잡하고 급변하고 있다.

영농 방식은 과거처럼 단순작업이 아닌 영농 경험과 기술에 의한 과학 영농 방식으로 경영되고 있고, 또한 작목에 따라서는 상당한 자본 투입이 요구되는 기업형 농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국산 농산물과 외국산 농산물간에는 가격뿐만 아니라 품질 면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 값싸고 질좋은 농산물을 생산하지 못할 경우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뿐만아니라 IMF의 한파는 도시 산업 못지 않게 농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기존 농민들도 영농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급변하는 농업 환경 여건에 대응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귀농준비가 필요하며, 그럭저럭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귀농할 경우 결코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가 없다.

특히 농사 경험이나 농촌에 연고가 없이 귀농하여 신규 창업을 하고자 하는 귀농자들은 영농 승계를 위한 귀농자 보다 여러 부문에 걸쳐서 보다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신규 창업을 하려는 귀농자들이 어떠한 내용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귀농과정별로 분석 정리가 필요하다.


① 귀농결심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농촌으로 내려가 생소한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귀농을 하려할 때는 사전에 농림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이나 단체, 농촌 지도자, 선배 귀농자를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2∼3년의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귀농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한 후 자신감과 확신이 생길 때 귀농에 대한 결심을 굳혀야 한다.

② 가족 동의
귀농은 생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고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수반된다. 때문에 농촌으로 내려가자고 할 때 선뜻 응할 가족은 많지 않으므로 일단 아내와 자녀들을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③ 작목선택
자신의 여건과 적성에 맞는 작목을 선택하여야 한다. 농사는 자본의 순환 기간이 길고, 농지 구입 및 생산 시설을 마련하는데 많은 자본이 소요되는 데다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과 자본을 고려하여 작목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낙농, 양계, 화훼 등은 초기 시설 투자에 자금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대체로 자본이 부족할 경우 채소나 콩 옥수수 감자 같은 식량 작물을 선택하는 것이 적합하다.

④ 영농 기술 습득
작목이 선정되면 그에 관한 영농 기술을 농촌지도소, 농협, 귀농운동본부 등에 설치된 귀농자 교육 프로그램이나 또는 성공한 농가의 견학, 현장 체험을 통해 충분히 배우고 읽혀야 한다.

⑤ 정착지 물색
작목을 선택한 후에는 자녀 교육 등 생활 여건과 선정된 작목에 적합한 입지조건이나 농업 여건 등을 고려하여 정착지를 물색하고 결정해야 한다. 정착지에 관한 정보는 복덕방, 인터넷을 이용하여 수집할 수도 있지만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수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국민 휴양과 환경보전 농업을 위주로 한 관광 농업을 하려 할 경우에는 산간 지역을, 과수 낙농 한우 사육은 준산간 지역을, 시설 채소를 중심으로 한 집약적 농업을 할 경우에는 도시 근교를, 벼농사를 할 경우에는 평야 지역을 정착지로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⑥ 주택 및 농지구입
정착지가 결정되면 자신이 거처할 주택이나 농사지을 땅을 장만해야 한다. 주택은 신축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 주택을 구입할 것인가, 신축할 경우 주택의 규모와 시설 형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농지도 임차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 매입할 것인가를 결정한 뒤 최소 3-4군데를 골라 비교해 보고 선택해야 한다. 이 때 농협이나 농촌지도소와 상담을 하거나 자문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⑦ 영농계획 수립
끝으로 합리적이고 치밀하게 영농 계획을 세워야 한다. 농작물을 수확하는데는 최소 6개월에서 길게는 4∼5년이 걸리므로 자신있는 작물, 가격 변동이 적은 작물, 기술과 자본이 적게 드는 작물을 중심으로 영농 계획을 수립하여 귀농 첫해부터 어려움을 피해 나가도록 하는 편이 좋다.
출처 : 시골로 간 꼬마
글쓴이 : 이명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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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2-3년 후에 도시의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시려는 분들이나.... 도시의 생활을 하시면서 지금은 먹고 사는 일에 바쁘지만 조금 일의 여유가 생기면.... 주말영농을 하기 위해 미리 농지를 마련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농지를 매입하신 분들이 아니라면 이런 분들을 부재지주라고 합니다.

토지 소유주의 주소지가 농지의 관할지역이나 연접지역에 속해 있지 않는 분들입니다.
요즘 농지은행에서 농지를 소유한 부재지주에게 일괄적으로 안내문을 발송하고 있습니다.

안내문의 내용인 즉......

소유한 농지를 자경하지 않을 시에는 농지법 위반에 걸리므로....

농지은행에 맡기시라는 취지이지요.

부동산업체에서 관련지역 부동산소유주에게 매매나 임대의사가 있는지 DM 발송한 것과 똑같은 일을 한 겁니다.
사실 처음 공문을 받아보신 분들은....

내가 부재지주인데....농지법 위반에 걸린 것이 아닌지....걱정을 하게 만드는

요소의 글귀들이....많이 있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농지은행은.....정부가 공인한 회사로 부재지주들이 5년동안 자경의 의무를 피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지만...농지은행에 맡겨 부재지주를 피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을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좋고 나쁜 점은 상황에 따라 조건이 다를 수 있으므로 관할 지역 농지은행에

상담을 받아보시고....처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통된 사항이 있지만....다른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농지은행에서 하는 일은....

알고보면 부동산중개업체와 업무성격이 비슷합니다.
농지임대를 대행해주고 중개수수료를 받으니까요.

매매도 같이 합니다.
그런데.....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농지은행에 위탁을 맡겼다고 해서 부재지주 단속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위탁한 농지가 임대가 나가서 임대받으신 분이 농사를 지으면 다행이지만....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농지가 임대되지 않으면....농지은행에서는 이에 대해 책임을지지 않습니다.

단속기관에서는 해당년도에 농사를 지었는지 안지었는지만 가지고 단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지가 임대되지 않으면 그 해 농사는 주인이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정부에서 농지를 매입한 사람은 5년동안 자경의 의무가 있지만...

농지은행을 통해 임대를 준 경우는 자경의무를 면제해 준다는 것뿐입니다.

개인간의 임대는 불법이구요. 단속되면 걸리는 것이죠.
그리고, 참고적으로 아셔야 할 부분은 2004년도 이전에는 자경을 하지 않아 농지법 위반에 걸리면 무조건 처분하게 되어 있으며 매년 공시지가의 20% 씩 5년동안 농지를 처분할 때까지 부과됐지만....

이제는 단속되어도 이후 3년동안 자경을 한다면 과태료부과도 되지 않고 농지도 처분하지 않아도 되는 유예기간에 생겼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단속받으셔도 농사를 지으실 생각이 있으시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그리고, 농지은행에서 부재지주에게 해 줄 수 없는 일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1. 매입한지 1년 미만의 농지는 위탁을 받지 않습니다.

2. 임대 받을 농민이 없으면 농지은행에서는 위탁받은 것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 본인 스스로 그해 농사를 책임지셔야 합니다.

3. 소규모 농지 (진흥지역 1,000㎡ 미만, 진흥지역 밖 1,500㎡ 미만)은 위탁받지 않습니다,

4. 도시지역 및 계획관리지역내의 농지(농업진흥지역은 가능)은 위탁받지 않습니다.

5. 개발 예정지역(토지이용계획확인원으로 확인)도 위탁받지 않습니다.

 


* 개인간의 임대의 경우 현행법상 불법이지만.... 농지은행에 임대자와 임차농민이 같이 방문하여 농지은행의 임대차계약서 양식을 통해 계약을 하면 합법화됩니다. (비용은 10만원 내외입니다.)

귀농의 현실과 성공하는 귀농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것은 큰 결심을 하지 않고는 힘든 일입니다. 특히 목가적인 생각으로 귀농을 하면 실패하는 지름길입니다. 귀농의 현실과 성공할 수 있는 귀농에 대한 전문가의 글을 소개합니다. 

도시에서의 삶이 고단해지고, 명퇴나 해고 등의 구조조정으로 생활의 안정이 위협을 받게되면 많은 사람들이‘귀농’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농촌을 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성공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농촌은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자금의 회전이 늦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직업을 바꾼다든가, 농촌으로 주소지를 옮기는 것만으로는 귀농을 하였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귀농을 하여 성공하였다 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농민으로 살아 간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희들 부의 많고 적음에 성공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귀농’을 하여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입니다. 

그러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귀농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끝에 ‘귀농’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즉, 철학을 바탕에 두고 고민한 후 귀농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귀농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실존의 문제를 고민하다, 귀농을 하여 생존의 문제를 고민 한다” 또 “귀농은 정신적 호사에 육체적 혹사”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귀농의 꿈과 현실의 괴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 귀농 현황 
귀농운동 본부가 활동을 시작한 1996년 이래 많은 사람들이 귀농을 하기도하고, 귀농을 하기위해 교육도 받았습니다. 

특히 1998년 IMF사태를 전후해서는 귀농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농림부에 따르면 ‘90년 이후 '98년 4월말까지 귀농 가구수는 모두 9,881가구로 3년간 연평균 2천가구 정도가 귀농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IMF의 영향으로 불황의 찬바람이 몰아친 ’97년 하반기부터는 젊은 청장년을 비롯한 도시인들의 귀농인구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농촌으로 돌아가려는 인구는 점점 더 가속화되리라고 봅니다. 

연령층을 보면 40세 미만이 전체의 49.9%가 되고 있어 이는 농업분야에 창의적인 경영능력을 제공하는 인적자원으로 큰 활력소를 불어넣은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2000년도를 지나면서 귀농 인구는 감소세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97-98년도에 아무 준비 없이 귀농한 사람들의 탈농이 시작되면서, 또 도시에서의 경제적 기반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귀농’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농촌행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1년 이후 귀농을 원하는 사람들은 다시 증가 추세에 있으며, 그 연령도 젊어지고 학력도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것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00년 설문조사 통계자료 
1. 귀농자의 귀농이전 직업 
회사원이 187명(38.1%)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자영업이 175명(35.6%)이었습니다. 
그 외에 노무자, 공무원, 무직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2. 귀농자의 교육수준 
조사대상자의 교육수준에 대한 결과는 다음의 <표2>와 같았습니다. 
고졸이 226명(46.0%)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대졸이 123명(25.1%)으로 나타났습니다. 

3. 귀농동기 
조사에 응답한 귀농자들의 귀농을 하게 된 이유는 다음의<표3>과 같았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라고 응답한 사람이 94명(19.1%)으로 가장 많았고, 사업에 실패해서 귀농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86명(17.5%)으로 두 번째로 많았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귀농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78명(15.9%)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외에도 농업에 대한 전망이 밝아서라고 응답한 사람이 53명(10.8%), 전원생활 및 건강을 위해서 라고 응답한 사람이 48명(9.8%)등으로 나타났습니다. 

● 2004년 설문조사 통계자료 
1. 귀농 이전 직업 
2004년의 조사로는 귀농 이전의 직업이 회사원(35.4%), 전문직(20.3%), 교사(15.2%), 그 외 시민단체 활동가, 자영업, 공무원, 기타 등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2. 귀농자의 교육수준 
귀농자의 교육수준으로는 몇 년 사이에 더욱 높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사한 바로는 대학원 졸업(7.6%), 대졸(67.1%), 전문대졸(3.8%), 고졸(21.5%)의 분포로 나타나 중졸 이하의 학력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3. 귀농동기 
귀농의 동기로서는 IMF 시정을 벗어나 스스로의 자각에 의한 인간다운 삶을 위해(41.7%)와 도시 생활의 회의를 느껴서(26.5%)를 합하면 68.2%의 귀농자가 단지 생계수단으로써 귀농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전원생활(7.5%)이나 노후대비(6.3%)까지 합하면 무려 82%의 귀농자가 돈 때문에 귀농을 감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 할 수 있습니다. 
(조사 대상의 범위가 작아 신뢰도는 약간 떨어질 수 있으나 실제 귀농하여 어려운 생활을 꾸려 가면서도 설문에 응해준 사안이므로 충분히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 귀농교육 현황 
귀농하고자 하여 귀농에 관한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현 시점에서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의 특징은 뚜렷한 자기 철학을 갖고 있으며 귀농을 위해 준비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전국에서 귀농학교 과정을 수료한 인원수가 지금까지 총 3,743명에 이르고 이것은 연간 468명이 8년간 귀농학교 프로그램을 이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귀농의 성공요인 
지금까지 알아본 귀농 및 귀농교육의 현황을 바탕으로 귀농의 성공요인을 꼽아보면 다음 몇 가지를 꼽아 볼 수 있습니다. 

1. 귀농의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누차 말했듯이 귀농을 단지 직업을 바꾸는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귀농 정착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본인이 왜 귀농하려고 하는가? 나는 과연 귀농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이 땅에서 귀농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는가? 귀농 이외의 살아갈 방법은 없는가? 다른 방법도 있는데 꼭 귀농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것에 대한 스스로의 확고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귀농 후 많은 어려움이 닥칠 때 견디기가 힘들 것입니다. 지금 농촌에서 귀농 자를 대하는 시선은 다음과 같이 나뉘어 집니다. 

첫째는 실업자가 급증하게 될 전망이므로 도시의 실직자들이 귀농을 할 경우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둘째는 영농의 규모화 전업화를 위하여 농가호수 및 농가인구의 지속적인 감소가 불가피한 실정인데 기존의 농업인 들과 경쟁관계가 될 귀농인구를 환영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부정적인 입장이며, 노령화, 부녀화, 추세가 지속 되어 온 농업인력의 질적 향상과 농촌사회의 활력화에 기여한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지역의 정서나 지방자치단체 지도자의 취향에 따라 귀농자가 처 할 수 있는 환경 또한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귀농자는 근본적인 철학적 이유를 갖지 못하면 정착하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2. 귀농의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귀농 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귀농을 하여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때 본인이 추구하는 목표가 없다면 흔들리게 마련이고 그것은 곧 탈농을 생각하게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목표란 어떤 거창한 의미를 가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귀농해서 어떤 작물을 키워서 어떻게 팔 것이며, 마을에서는 어떤 일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수준이라도 정확하게 목표를 갖고 있어야 삶의 방향에 초점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귀농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귀농을 준비하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금을 마련하거나, 영농기술을 배우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간과 할 수 없는 문제 이기는 하나, 짧은 기간에 자금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충분히 자금을 모으려 하다가는 귀농을 못하기가 십상입니다. 

또 어느 지역으로 귀농을 할지 정해지지도 않았고, 어떤 작물을 키울지도 정하지 않았는데 지역의 편차가 있고 작물별로 특색이 강한 재배법의 영농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마음만 앞서는 욕심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준비는 첫째, 자기 가족의 최소한의 생활 경비를 산출하라는 것이다. 이 최소 경비를 산출하여, 이 경비를 어떻게 마련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세운 후 귀농을 하여야 합니다. 둘째, 본인이나 가족의 성향을 파악하여야 합니다. 이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문제이나 귀농 후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키는 부분입니다. 본인의 취향은 다양 할 수 있으나 크게 나누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도사과이고 하나는 탄광과입니다. 도사과란 다시 말해서 독립형으로, 마을보다는 좀 떨어진 산속에 거주 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부대끼거나, 농사를 많이 짓는 것 보다는 유유자적하고 자연을 벗 삼아 명상을 하거나, 산야초 약재 등에 관심을 보이는 부류를 말합니다. 

이들은 치열하게 일하여 소득을 올리고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는 자연과 함께 여유롭고 한가로이 사는 것이 더 마음 편안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탄광과로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여 소득도 올리고 마을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하여 스스로 존재 이유를 느끼는 협동형의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마을 일에 참여하고 농사도 자신의 양껏 지어야 귀농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의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하는 차원이 아니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귀농하고자 하는 본인이 자신의 성향을 잘 파악하여 귀농지를 정해야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4. 귀농 실행 후 주변의 환경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귀농 후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상관없이 살 수 있으면 편하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본인이 속해있는 도, 군, 면, 리 까지 나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각 행정구역이나 지방 자치단체의 특성을 파악하고, 잘 이용 할 필요가 있으며 농업 기술 센터나 농협 등의 기관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마을에서 시행하는 각종 사업이나 공공근로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잘 활용하도록 하고 마을 이장등과도 잘 교류 할 수 있도록 노력 하여야 합니다. 

5. 집과 땅을 구할 때 신중해야 합니다. 
귀농의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집과 땅 이지만 귀농 할 때 가지고 있던 자금으로 집과 땅을 구입하고 나면 당장 농촌에서 생활비나 영농자금 문제로 고생을 하게 됩니다. 

땅의 상태나 성질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땅을 구입하면 나중에 내가 키우려 했던 작물과 그 성질이 맞지 않아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통상적으로 급하게 외지인이 땅을 사고자 하면 비싸게 파는 경우도 많아 나중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자 할 때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땅과 집은 그 마을에 정착해서 3년 이상 살아본 후 구입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4.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도농교류 촉진 방안 
이제 농촌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농촌만의 힘으로는 회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농촌의 힘으로 발전해와 온갖 편리함을 다 누리고 살아온 도시민이 나서야 할 때 입니다. 

그러나 ‘도농교류’ 이것 또한 농촌 홀로 짝사랑이 아닐까? 제발 농촌으로 와 달라고 농촌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람들, 무슨 축제다, 행사다, 포럼이다, 아무리 해봐야 반짝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귀농을 하는 사람들을 TV에서 촬영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교류를 촉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각종 사업들, 관광농원, 유리온실, 도농교류, 팜 스테이, 녹색마을, 마을가꾸기 등 어느 것 하나 뚜렷하게 성공하여 도시민이 찾아와 북적거리고 농가의 소득향상에 크게 기여 한 것이 있는가? 오히려 각종 실패로 흉물로 남아있는 건물보다도, 더 큰 마음의 상처와 빚만 남지 않았는가? 그러면 왜? 이런 사업들은 실패로 돌아갔는가? 그것은 도시나 농촌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도시민이 오도록 하기위해 관광농원을 만들고 팜 스테이를 위해 펜션을 만들고 각종 편의 시설을 만들고 홍보를 해봐야 도시민들은 호기심으로 한번 와 볼뿐 지속적으로 찾아오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농촌에 덩그러니 아무리 집을 잘 지어봐야 호텔의 편리함에 뒤떨어지고, 풍광도 아름답지 않으며 무엇보다 시간을 보낼 재미와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집한 채 지어놓고 짚 몇 다발 가져다 놓고, 웅덩이 파고 미꾸라지 몇 마리 넣어 놓고, 흙 물레 몇 번 돌리게 한다고 도시민들이 지속적으로 방문하여 돈을 쓰고 가지 않습니다. 얄팍한 상흔임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되고 있다는 마을이나 그저 그런 마을이나 시설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결코 편의시설 때문에 농촌을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 온 온갖 개발과 건설이 도시인을 �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나 도시와 똑 같기 때문에 아무런 흥미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보존된 바다나, 산, 계곡으로 가지 농촌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교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농촌을 살리려면 농촌에 인구를 늘려야 합니다. 
농촌에 각종 시설을 위해 투자했던 것을 멈추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과감히 투자해야 합니다. 기존의 농민도 귀농자가 오면 내 몫이 줄어든다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지역 농협이나 행정관서등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인구 늘리기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둘째, 농촌을 농촌으로 보존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도시 따라가기 개발을 멈추고 농촌은 농촌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상술이 아니고, 농촌 고유의 풍경과 환경을 보존하여 농촌 어메니티를 유지 하여야만 농촌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어설픈 개발은 오히려 낙후된 환경만 가져 올 뿐입니다. 지금부터 농촌은 모든 개발을 멈추고 보존을 위해 노력 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복원을 하여야 합니다. 

셋째, 농촌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건물 몇 채에 황토 찜질방, 체험학습, 박물관, 메뚜기 잡기 등 백화점식 나열로는 더 이상 아무 흥미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TV프로의 리포터들만 흥이 날 뿐입니다. 

이런 하드웨어에 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스며들어 있어야만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흥이 난 사람들이 시설의 불편한도 감수하게 됩니다. 농촌 아니면 볼 수 없고, 해 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넷째, 농업발전에서 농촌복원으로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이때까지 정해진 농업에 사람이 적어야 각자의 소득이 커진다는 경제논리로 정책을 펴왔으나 우리의 농촌은 어떻게 되었는가? 잘 살지도 못하고 영농의 주체인 사람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사람도 다시 오게 해야 하고, 잘 살기도 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눈을 농촌의 복원으로 돌려 봅시다. 농촌이란 촌락, 즉 마을을 말합니다. 마을이란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그 사람들은 농사만 짓는 농민 뿐 만이 아니고, 의사, 선생, 가게주인, 약국, 식당, 문방구, 기타 등 우리가 농업 살리기를 하지 않고 농촌을 되살리려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국토의 균형발전이니 행정수도 이전이니 하는 골치 아픈 문제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속성상 산에서 들로, 들에서 물가로, 물가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대도시로 모여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인간의 이런 속성으로 도시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도시로의 유인책까지 썼으니 도농간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느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현재 농촌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 뜻을 가지고 농촌에 남아있거나 농촌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몇%나 될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살거나 별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노촌의 문제를 농업의 문제로 국한하여 생각하지 않고 국토 전체의 재화의 흐름으로 생각하여 정책을 펼쳐 왔으면 어떠했을까? 아마 젊고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농업은 국가와 인간의 생존이 걸린 생명산업임을 알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농촌이 농촌답게 보존되어 있다면 도시에서 지친 도시민들이 주말이면 어디고 찾아와 한가로이 쉬면서 활력을 재충전 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도시민이 농촌으로 오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도시와 다른게 없고, 아이들의 친구도 없으며, 막걸리 한잔, 차 한잔 나눌 친구도 없고, 모시기 어럽고 보기만 해도 안타까운 노인들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농촌을 농촌답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없는 현재의 농촌에서는 무엇을 해도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꼭 소득을 바라고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첫손에 두지 말고 연구를 하여야 합니다. 농업보다는 농촌을 복원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어야 합니다. 
농업만을 생각해서는 우리의 농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 농촌에 투자되는 모든 돈의 쓰임은 인구를 늘리고, 농촌보존을 우선적으로 하며, 그 위에 농촌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귀농에 성공하려면 귀농을 원하는 사람은 각자대로 철학과 목표를 뚜렷이 갖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며, 행정당국은 농촌 인구 늘리기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농촌을 보존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야 합니다. 

글·성여경 (전국귀농운동본부 사무처장)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의 그 한결같은 마음을 멋들어지게 노래하고 있는 국민가요 <님과 함께>의 한대목이다. 생각해 보자,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랑하는 님과 함께 소박하게 농사짓고 사는 일이라니! 가던 길 멈추고 상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노래야 모두가 즐겁지만, 그런 마음의 울림에 깊이 공명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귀농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실제 농사를 지으러 농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지경이다. 왜 그럴까?

귀농은 간단히 말해, 농(農)촌으로 돌아가는(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오해와 숨겨진 진실, 막막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그리움, 주변의 반대와 또 한편의 격려, 현실적 생존의 문제와 실존적 가치관의 문제 등등. 하나하나 확실히 짚어서 역으로 튼튼한 징검다리로 만들어야 할 문제들이 너무도 많다.

도시에서 귀농을 준비하는 단계를 포함해서, 실제 귀농을 해서도 필요한 덕목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은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짧고 부족한, 게다가 다소 과격한 길잡이일 뿐이다. 귀농이라는 아름다운 꿈이자 냉정한 현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길고 긴 과정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다. 어쨌든 수년간의 경험이 녹아든 결과물이고,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담은 글이기도 하다.

§ 귀농을 위한 몇가지 금언

● 귀농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텃밭농사-주말농사를 시작하라.

귀농을 해서 백평 농사를 하건 만평 농사를 하건, 무언가를 심고 거두게 될 것이다. 도시생활 내내 흙과 멀어진 채로 살다가, 귀농을 하면 그때 가서 거창하게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이라면 문제가 있다.

재를 묻혀서 심는 씨감자의 경험, 알이 맺히지 않는 배추농사의 경험은 부지런하면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건을 탓하지 말고 좀 멀어도 좋으니, 아이들과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보자. 옥상이 있다면 화분에 고추나 배추를 심어보자. 지하철에서 스포츠신문을 볼 때가 아니다. 영농서적을 외우듯이 읽어보자. 5평 농사의 풍성함을 만끽해 보자. 귀농의 필수조건이다.

● 준비 기간 동안 귀농교육을 받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으라.

도시에서 귀농 준비를 하는 순간 귀농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생태귀농학교에 참여하면 많은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얻게 된다. 간혹 귀농교육을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강의나 다른 이들의 사는 이야기보다는 내가 직접 부딪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농사만큼은 혼자서 되는 일이 없다. 농사는 원래 하늘이 짓는 것이고, 이웃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할 수도 없다. 하늘이든 이웃이든,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는 농사건 귀농이건 불가능하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귀농은 고달프기만 하다.

귀농과 관련된 정보나 영농정보도 넘쳐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인터넷 덕분에 정보의 홍수라, 오히려 옥석을 가리는 일이 더 힘들 지경이다. 그 중에 내가 원하는 정보만 집중해서 찾고 스크랩해 보자. 정작 귀농해서는 자료나 정보를 폭넓게 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 철을 좇아 사는 일로만 하루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준비하는 두툼한 자료뭉치는 분명히 큰 자산이 된다.

● 철학적 고민, 시대와 호흡하는 정신적인 무장이 중요하다.

철학적 고민이라니, 좀 생뚱맞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귀농은 삶의 전면적인 전환이다. 단순히 샐러리맨에서 농부로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의 생활양식이 농촌생활에 어울리게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무수한 철학적 고민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도시 친구들에게 감자 한 박스를 팔아보자.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그 친구는 나의 수고와 땀을 모른다. 감자가 알이 작다느니 남아서 썩었다느니, 속 썩는 이야기 듣기 십상이다. 어쩌다 생산을 많이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아볼라치면, 시장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농민들이 왜 수확 철에 더 속이 터지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게다가 수해나 태풍이라도 얻어맞으면? 그래도 나는 귀농을 행복하다 할 것인가? 그 때, 나의 준비된 철학, 단단한 가치관이 필요하다.

이 글 처음에 적은 노래가사에 나오는 저 푸른 초원도, 그림 같은 집이 서 있을 곳도,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의 농촌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농촌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다. 노래에 나오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의 농업 순환은, 다름 아닌 WTO 체제 아래의 한국농업 위의 순환이다.

귀농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는 시공을 초월한 순백의 종이가 아니다. 바로 오늘의 힘겨운 농촌과 무너져 가는 농업, 그 위에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민을 가서 농사짓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달리 생각하고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농업?농촌의 역사와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되, 애정을 가지고 해야한다.

● 귀농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라.

결론적으로, 귀농을 해서 도시생활과 같은 경제적 수준을 유지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자연이 주는 수많은 기쁨과 혜택이 또 다른 수입이다. 이걸 누릴 수 있으려면 앞서 말한 철학적 고민이 받쳐주어야 한다. 도시에서는 식의주와 건강문제, 교육문제에 들어가는 돈은 밑도 끝도 없다. 모두 돈과 맞바꾸어야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다르게 접근할 수 있고 풀 수 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하는 이야기들은 귀농본부에서 펴내는 계간지 <귀농통문>에 가득하다.

대체 자금이 얼마정도 있어야 귀농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물론 답은 없다. 그렇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할 때는, 몸 누일 집과 50평 텃밭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 이상은 옵션이다. 황토집을 짓든 시설농사를 하든 소를 키우든 그건 모두 옵션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웃는다. 전혀 웃을 일이 아닌데 말이다.

도시생활을 고스란히 이동한 귀농을 생각하면 자금은 수억이 들 것이다. 도시에서 바쁘게 일하던 것처럼 농촌에서도 일하려고 한다면, 우선 좀 멈추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귀농설계는 그곳에서 다시 해야한다. 물론, 도시에서의 설계도 필요하지만, 농촌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특히 땅 사는 일, 집 짓는 일은 되도록 천천히 신중하게. 귀농은 치킨집 신규창업과는 전혀 다르다. 속도와 경쟁이 아니라 느리게 천천히 사는 일이다. 자금을 많이 들이면, 그만큼 바빠지고 고달프다.

● 농사로 돈 벌 수 있다는 생각은 접어라.

간혹, 농업을 통한 성공사례가 소개된다. 부디 현혹되지 마시기를. 농사꾼 1~2%의 특출난 사례가 우리의 것이 되기는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꿈도 꾸지 않는 것이 건강에 좋다. 그런 분들의 경우,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 아니면, 정말 시기적절한 아이템이 있어야 한다. 귀농을 하려는 이들은 그 줄의 맨 끝에 서 있다.

농사는 투기가 아니다. 한탕으로 되는 농사는 없다. 사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귀농을 하지 않아야한다. 수십 년 유기농업을 하시는 선생님들 가라사대, 돈 버는 작물은 없다. 땀 흘린 만큼만 거두고 먹는다는 진리에만 충실하면 된다. 귀농을 해서는, 돈을 번다는 개념이 달라야한다. 자급자족만 할 수 있어도, 좀 거칠게 말하면 ‘시골에서 붙어 있을 수만 있어도’ 성공적인 귀농이라고, 귀농자들은 말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다면, 이를테면 소를 규모 있게 키우거나 시설작물 같은 것을 해보고 싶으시다면, 좀 천천히 바닥부터 일을 익힌 후에 투자를 하시라고 곡 말씀드리고 싶다. 프로 농사꾼들이 자기 노동을 최대한 들여서 농사지어도 될까말까 한 일이다. 농업은 계산 잘 해서 투자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며, 거기 내 땀이 깃들여야 한다.

농업소득에 관해서 유념할 일은 유통에 관한 문제이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제때 제값에 팔지 못하면 그만큼 허탈한 일이 없다. 귀농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유리한 면도 있다. 도시 연고를 잘 활용하면 되지만, 그게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유통망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 농민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작목반에 가입하거나, 유기농 생산자로 인정을 받아 생협이나 한살림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채우려면 게으를 수가 없다.

농사로 돈 버는 방법! 그 어떤 작목이든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능력이 있으면 가공을 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친지든 조직이든 든든한 유통망에 기대라는 말 외에 더 보탤 말은 없다.

● 농촌에는 농사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촌에서 직업을 이어가라.

귀농을 하게 되면 꼭 농사를 지어야 할까? 꼭 농사꾼이 되어야만 할까? 아니다. 농촌에는 농사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귀농도 농사를 지어야만 귀농은 아니다. 시골에서는 그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10평 채마밭 가꾸는 일은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예를 들면 더 좋을 것 같다. 우선 교사들은 그런 면에서는 유리하다. 부부 중의 한사람이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일을 하면 여러모로 수월한 법이다. 아내는 읍내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남편은 농사꾼으로 땀 흘리는 부부들도 있다. 남자들은 지역 내의 농업관련 활동을 전업으로 할 수도 있다. 영농조합법인이나 생산자공동체 사무 일을 보거나, 트럭을 몰고 배송을 하러 다니는 귀농자들도 있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지역 정보를 두루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여자들은 여성농업인센터 등에서 방과 후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면사무소에서 농민들 컴퓨터교육을 계약직으로 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 일들은 도시에서 일을 해 온 귀농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농번기에 품을 팔거나 산불감시원 등을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을 일원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아야 가능하고, 생활의 보조 수단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일들도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매이지 않고 자원봉사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몇 평 농사이든 평수는 상관없이, 역시 귀농은 역시 내 농사가 제 맛이다.

● 지역 관공서나 기관 및 조직을 적극 활용하라.

귀농을 지원하는 안정적인 지원시스템은 없다. 스스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 시골 면사무소는 도시의 동사무소와 같은 레벨이지만, 농촌생활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면사무소 직원과 통하면, 상당한 지역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농업기술센터의 역할도 무시 못 한다. 도시에서야 가급적 관공서 안 가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농촌은 관공서와 친해질수록 좋다. 실질적인 귀농자 지원 방안은 각 면 단위에서 쥐고 있다. 속된 말로 자꾸 찔러야 한다.

농촌의 특징은 무수한 민간조직이 있다는 것인데, 웬만한 촌부들은 이장이나 무슨무슨 모임 회장을 안 해본 분이 없다. 생활과 직결되는 작목반부터, 대체 무슨 일들을 하는지 알길 없는 동호회와 오래된 농촌조직들이 있다. 이를 활용할 수 있다면 정착에 도움이 된다. 후견인들을 얻는 것이다.

귀농자들은 붙박이 농민들과는 달라서, 좋은 교육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또 도시에서의 경험 때문에 무슨 박람회니 교육이니 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대충 알아본다. 근래에는 모든 군에서 친환경농업 육성을 과제로 삼고 있어서, 상당한 교육과 투자를 하기도 한다. 여기 잘 참여하고 활용하기만 해도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 있다.

● 귀농지 선정은 연고지와 인맥을 적극 활용하고 인내하라.

귀농지 선정만큼 막막한 일이 있을까 싶다. 심지어 지도를 펴고 눈감고 찍은 곳부터 돌아보았다는 분도 있다. 어디를 어떤 방식으로 다녀야 내 귀농지를 찾을 수 있을까.

고향으로 귀농을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고향을 피하는 이유야 알지만, 고향은 또 다른 면으로 품어주는 곳이다. 이제는 농촌 어르신들의 귀농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아는 귀농자가 있는 지역이면 좋다. 귀농자의 마음은 귀농자가 아는 법이다. 서로 의지할 수 있다. 그런데 꼭 주의할 점들이 있다. 우선, 귀농자라고 해서 나를 도와줄 의무는 없다. 그런데도 용케 인연을 얻어 귀농자와 함께 마을을 돌아보고 술 한잔 나누게 된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건만, 당장 내 목표가 급하다고, 그런 소중한 인연을 허술하게 생각하고 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한번 만난 귀농자와는 자주 안부도 묻고, 농산물도 앞장서서 팔아 주면서 더 깊이 만나기를 바란다. 행여 사귀기도 힘들고 할 이야기가 없을까 걱정 마시라. 농사 이야기만큼 사시사철 무궁무진한 주제가 어디 있으랴.

그 외 몇 가지 요령은 있다. 우선 대상 지역을 최대한 좁히는 것이 좋다. 하나의 군만 집중 공략하라. 지역 부동산정보지 같은 것도 활용하고, 면사무소 직원을 잘 만나면 같이 다니기도 한다. 마을 이장을 찾아갈 때는 빈손 말고 음료수 한 박스는 사들고 가기 바라고, 그 지역 토박이 농사꾼을 알면 제일 좋다. 귀농지를 찾는다고 차 몰고 다니는 마음이야 절절하지만, 시골 사람들 눈에는 부동산 투기하려는 사람과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땅값부터 묻는다든지 할 일이 아니다. 뭐 좀 있는 행세는 제발 하지 말기를.

우선 땅은 빌려서 농사를 짓기를 권하고 싶다. 마을 어른들은 한해 농사 하는 것 보고서야, 이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는 것인지 아닌지를 믿는다. 그러니 첫해 농사는 정말 열심히 해야한다.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다음부터는 농지를 빌려주겠다는 사람, 내 땅을 싸게 사라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년이면, 옆 마을이나 산너머 마을 정보도 얻게 된다. 사실 일개 면 범위의 정보면 충분하건만, 우리는 천여평 농지를 얻기 위해 전국을 헤매는 것이다.

땅을 사는 일과 집을 짓는 일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촌생활 속에서 얻는 정보는 살아있는 정보이다. 또, 살면서 내가 어떤 형태의 귀농을 할 것인가가 좀더 구체화되면, 농지와 집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많은 귀농자들이 거처를 옮긴다. 밀려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좋은 선택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귀농지를 찾는 일은 배필을 찾는 일과 같다. 아주 극적인 인연이다. 노력하는 필연과 하늘이 내리시는 우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 내 맘에 꼭 맞는 귀농지는 없다. 직업상 수백 동네를 다녀 보았지만, 집과 농지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정말 기막힌 곳이라 생각한 집은 서너군데에 불과하다. 고향은 어디인가? 정들면 고향이다. 나의 귀농지는 어디인가? 정들면 그곳이 최고다.


§ 성공적인 귀농의 최후 비결

“귀농은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귀농을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성공적인 귀농의 최후 비결도 여기에 있다. 귀농과 전원생활의 차이도 여기에 있고, 귀농의 최종 목표도 여기에 있다. 그 마을 사람이 되는 것. 귀농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을 사람이 되기 위해 중요한 점은, 마을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몸과 마음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열쇠는 애정과 믿음에 있다. 농촌이라는 이름 안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에 대한 애정과 그 중에서도 농민에 대한 믿음. 결국 사람을 믿지 않으면, 귀농이고 뭐고 풀릴 일도 없다.

흙이야 늘 정직하다. 땀 흘린 만큼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내가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들이 내게 기대는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노력은 꼭 뿌린 대로 돌아오지는 않지만, 힘들지만, 즐거운 숙제이다. 그 과정이 귀농이다.

귀농! 정말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귀농이 힘든 이유는 역설적으로, 귀농이 그만큼 귀한 일이라서가 아닐까?
은퇴 후 성공적인 전원생활을 위한 필수 체크 포인트
은퇴후 전원생활 - 철저한 준비ㆍ열린 마음이 관건



`시골에나 내려가서 살지'식 접근은 큰 오산
"최소한 텃밭 농사 가능할 정도의 준비 필요"



"우리 마을로 오는 도시민들이 있다면 적극 환영합니다. 하지만 시골에 와서 두문불출하며 독불장군식으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역 주민과 어울려 살겠다는 마음자세만 있다면 큰 어려움없이 시골에 정착할 수 있습니다."

김희경 횡성군 강림면장이 전원생활을 위해 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치악산 동쪽의 강림면은 최근 들어 전원주택이 소문없이 들어서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로 인구는 630세대 1천500명 정도. 김 면장은 "요즘엔 시골도 많이 달라졌다"면서 "전원생활 성공 여부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안되면 시골에 내려가서 살지", "텃밭이나 가꾸며 살고 싶다" 하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전원생활을 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했다가는 큰 오산이다. 전문가나 귀촌ㆍ귀농 선배들이 실패하지 않는 전원생활의 비결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철저한 준비와 지역주민과 더불어 살겠다는 공동체 의식. 특히 성공적인 귀촌에는 지역주민과의 원만한 관계, 협력, 유대가 관건이라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 경치만 즐기는 전원생활은 오래 못가 = 전북 진안군청에서 마을과 군청 사무를 담당하며 귀촌 희망자를 돕는 `간사장'을 맡고 있는 구자인(41) 씨는 최소한 텃밭농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사전 준비를 강조한다.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04년 귀촌한 구씨는 "도시민의 성공적인 전원 정착에는 각자 맞는 방식이 있겠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텃밭농사가 연결고리가 돼야 한다"면서 "그래야만 수확의 기쁨, 보람, 재미도 찾고 건강도 돌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적인 여유를 바탕으로 경치만 즐기는 전원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구씨는 도시민들이 귀촌하기 전에 지속적으로 주말농장을 경험할 것을 권했다. 농촌으로 들어가는 것도 두렵지 않고 적응도 빠르기 때문이다.

전원생활을 할 집과 땅을 구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다. 구씨는 "도시민들은 살던 아파트를 팔거나 전세금을 빼면 어느 정도 큰 돈이 되다보니 시골땅이나 집을 너무 쉽게 사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초기 투자가 과도하면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도, 되돌리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상당수의 귀촌 선배들이 무턱대고 집이나 땅을 사서 시골에 내려오기보다는 최소 1-2년 정도는 남의 땅을 임대하거나 전세로 살면서 경험도 쌓고 지역 물정을 익힌 다음 집과 땅을 정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남의 집을 빌릴 때는 가급적 전세보다 월세가 안전하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집주인이 보증금을 내줄 수 없을 때 다른 세입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전원생활을 하기 전 영농교육이나 체험 과정 등 사전준비를 한 사람들은 농촌 이주후의 삶과 경제적인 성취도면에서 만족을 느끼는 반면 계획없이 귀농하거나 수동적인 사람들은 농촌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전반적으로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 사전준비 충분할수록 만족도 높아 = 특히 시골에 내려가 농사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생계형 귀농의 경우 사전 영농교육과 일정 기간의 실습이나 체험은 필수다. 유기농업이나 특용작물을 재배해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도 있지만 철저한 사전 준비와 노력없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극소수 농가의 `성공 스토리'일 뿐이라는 게 귀농 선배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농촌은 돈 별려고 오는 데가 아니며 돈 벌어 편하게 살려면 도시에서 그냥 사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 외환위기 때 철저한 준비 없이 이루어진 `IMF형 귀농'의 경우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는 게 농업 전문가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당시의 귀농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한 실태 조사에서는 56%가 "귀농은 실패한 선택", 62%가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들이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바로 `낮은 소득'.

유명 호텔의 `잘나가는' 소믈리에를 그만 두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귀촌한 김명웅(38) 씨는 지역주민과의 융화가 시골생활에 빠르고 손쉽게 적응, 정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귀촌하기 전 전국의 유명하다는 농촌 마을을 둘러보는 등 3년 간의 준비 기간을 가졌다.

성적 제일주의의 도시 교육풍토 등이 싫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시골을 선택한 김씨는 작년 3월말 부산에서 강원도 화천군 동촌리의 산속호수마을로 귀촌했을 때 일부러 승용차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는 급한 용무 등이 생겼을 때 마을 주민의 차를 얻어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이 다가서자 마을주민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는 모습이 마을사람들에게 `빈한함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 배운다는 자세로 마을주민과 어울려야 = 중풍으로 오랫동안 투병중인 어머니와 함께 귀촌한 김씨는 시골생활 두 달도 채 안돼 `마을 사무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마을 사무장이란 농촌체험관광마을 사업의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관리 등을 전담하는 인력. 쉽게 말하면 시민사회단체의 간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마을 총무다. 그의 사무장 월급은 100만원. 마을 홈페이지 관리와 사무장 보조로 50만원을 받는 부인의 월급까지 합치면 소득이 150만원이다. 이 정도의 소득이면 시골에서 생활하는 데 경제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다.

김씨는 "배운다는 자세로 마을의 고령자를 도와 같이 작물도 재배하고 농사 일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을주민과 정보도 공유하고 빨리 융화될 수 있다"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도시민이 시골에 와 무작정 큰 비용이 들어가는 비닐 하우스를 시작해 낭패를 보는 것보다 여러모로 현명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전처럼 도시민들이 시골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반대로 마을 주민이 외지인을 무작정 배척하거나 반감을 갖는 경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도시의 화이트칼라 은퇴자들이 건축비만 수억원이 들어가는 전원주택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경치나 즐기고 생활한다면 지역주민들이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최근 외지인을 보는 농촌주민의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한국리서치가 2005년 10월 농어민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72.9%가 도시민의 농어촌 정주를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도시민이 농어촌으로 오면 부동산 가치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이 더 좋아지고 농어촌 지역에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반면 부동산 투기나 도시민과의 위화감 등을 염려해 도시민의 이주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농어촌 주민은 25.5%에 불과했다.

"꿈 찾아 시골로"… '귀농열풍' 분다

2002년 이후 매년 급증세
예비 귀농자들은 이날 다소 어려워 보이는 ‘절기를 알면 농사가 보인다’는 주제의 수업을 들으며 강사의 설명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부지런히 받아적었다.

8월 출산 예정인 아내와 함께 온 이현진(33)씨는 “직장 생활 6년 동안 개인의 성취보다는 조직의 확대 재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 답답했다”며 “당장 농부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귀농이 현실 도피가 아닌 운명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직장을 지방으로 옮긴 뒤 텃밭을 가꾸다가 자신감이 생기면 영농에 본격 뛰어들 계획도 세워 놓았다고 했다.

부천에서 온 송영철(39)씨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 농사를 한 번도 지어 보지 않았지만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귀농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아내 이현정(36)씨도 “처음에는 세 아이들을 다 키운 뒤 농촌에 별장처럼 집을 짓고 살고 싶었다”며 “하지만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자연과 함께 살게 해주고 싶다”고 거들었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농업 여건이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의 행렬은 줄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귀농은 확고한 의지와 치밀한 준비 없이는 실패하기 십상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농림부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2만여가구가 귀농했다. 외환위기를 맞아 1998년 6400여가구를 정점으로 점차 줄어들다가 2002년(769가구) 이후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30%가량이 정착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귀농은 실패 확률이 높다. 전국귀농운동본부는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가르치지만, 1996년부터 최근까지 귀농교육을 받은 2000명 중 현재 농사짓는 가구는 700∼800명으로 여전히 성공률이 떨어지고 있다.

실제로 김모(42)씨는 2005년 4월 아무 연고도 없는 경북 영양에 둥지를 틀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2년 만에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농촌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에만 끌린 김씨의 고집에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했지만 생소한 농촌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반면 치밀한 준비를 거쳐 귀농한 경북 상주시 모동면 정양리 ‘향유농장’ 박종만(35)씨는 성공적인 귀농 사례로 꼽힌다. 박씨는 1998년 대학 졸업 후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어 경북 상주의 포도농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년간 남의 농장에서 일하며 쌓은 경험을 토대로 대학 시절 친구였던 아내와 함께 땅을 빌려 포도농사를 시작했다. 그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새마을지도자를 맡기도 했다. 지난해엔 처음으로 자기 땅 3000평을 샀고, 포도와 포도즙 등을 판매하며 풍족하지는 않지만 만족스러운 농촌 생활을 하고 있다.

◇귀농을 계획하고 있는 송영철(앞줄 왼쪽)씨와 부인 이현정씨 등 젊은이들이 15일 서울 용산구 농협중앙회 용산 별관에서 열린 ‘서울생태귀농학교’ 강좌에서 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우상규기자

귀농 7가지 점검사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설 농촌정보문화센터는 귀농을 위해 반드시 점검해야 할 사항을 결심순간부터 본격적인 영농계획을 수립하는 데 까지의 7가지 단계별로 제시했다.

먼저 ‘결심 단계’ 농업 관련 기관이나 단체, 농촌지도자, 귀농 선배를 방문해 필요한 정보를 미리 수집하고, 길게는 2∼3년의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신중하게 생각한 뒤 자신감과 확신이 생길 때 귀농을 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족 동의는 필수다. 아내와 자녀를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일이 귀농 준비단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작목 선택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자신의 여건과 적성, 기술 수준, 자본 능력 등에 맞는 작목을 선택해야 한다. 대상 작목을 선택하고 나면 그에 맞는 영농기술을 익혀야 한다. 농업기술센터, 농협, 귀농운동본부 등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다고 농촌정보문화센터 측은 밝혔다.

다음으로는 정착지를 물색해야 한다.

작목을 선택한 뒤에는 자녀교육 등 생활여건과 선정 작목에 적합한 입지 조건, 농업 여건 등을 고려해 정착지를 물색하고 결정해야 한다.

정착지가 결정되면 집과 농사지을 을 마련해야 한다. 집은 신축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 주택을 구입할 것인지, 땅은 임차할 것인지 아니면 살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농업기술센터나 농협 등에서 조언을 구해도 좋다.

본격적인 영농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는 합리적이면서도 보다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는 최소 6개월에서 길게는 4∼5년 걸린다. 따라서 자신 있는 작목, 가격 변동이 적은 작목, 영농기술과 자본이 적게 드는 작목을 중심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농촌정보문화센터 진재학 소장은 “도시민에게 귀농이나 전원생활은 평소 생각한 것과 달리 달콤하고 환상적인 생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자신이 어느 정도 귀농 의지가 있는지 살피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병 치료를 위해 2003년 귀농한 최석공·백금자 씨 부부는 지금 시골에서의 삶 자체에 푹 빠져 있다. 백금자 씨는 자기네의 인터넷 카페에 시골 생활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전하고, 그 글을 본 백씨의 친구들은 부러움을 숨기지 못한다. “금자야, 너 사는 모습은 참 쉽다.”

 



삼한사온 덕인지 며칠 심술궂던 동장군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진 겨울 오후, 단종의 넋을 모신 ‘장릉’ 노란 잔디 위로 몇 줄기 겨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서운 강원도의 추위에 인적이 끊긴 게 언제였던가 싶게, 이날은 평일인데도 나들이객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어서 오세요. 그렇잖아도 ‘그렇지’가 막 감자떡을 쪄내려는 참이었는데 마침맞게 잘 왔네요.”
요즘 한창 강원도에 사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최석공 씨(49)는 큰길가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연신 짓는 웃음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한눈에 보기에도 넉넉한 사람, 심성 푸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지’라니? 아내를 따로 부르는 애칭인가? 집안으로 들어서니, 짐작대로 세상 범사를 “그렇지” 로 일관할 것 같은 백금자 씨(42)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시루 너머에서 남편만큼 넉넉한 웃음을 짓고 있다.

 

우리를 맺어준 건 위문편지

“인터넷에 개인 카페 ‘금자와 감자’(cafe.daum.net/cwc1202)를 개설해 운영 중인데, 사이버 상에서 부르는 애칭이 저는 ‘그렇지’고 남편은 ‘아무렴’이에요. 강원도 사람들의 정서가 담긴 정선아리랑의 후렴구에서 따온 만큼 회원들이 아주 편안해합니다.”
원래 경기 이천시에 살았던 최씨 부부는 2003년 봄 원주시 신림면 황둔에 잠시 보금자리를 틀었다가 지난해 이곳 장릉으로 들어왔다. 이들 부부의 귀농 이유는 아내 백씨의 건강 때문이다. 이천에 살 때 백씨는 식당을 운영했었는데, 장사는 ‘주위의 돈을 긁어모을 정도로’ 잘 됐으나 몸이 말이 아니었다. 신장 기능이 약했던 백씨는 요실금이 심해 화장실을 기어갈 정도였고 맥박이 노인 수준에도 못 미쳤다.
이런 와중에 우울증까지 겹치며 ‘시골행이 좋겠다’는 의사의 진단이 떨어지자, 최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귀농을 결정했다. 안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원인 모를 허전함과 귀소 본능에 시달리던 차에 어차피 잘 된 일이었다. 귀농하고 나자 백씨의 병은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나았고, 이후 백씨의 고향인 영월 쪽으로 옮겨와 지금껏 신관 편하게 잘 살고 있다.
최씨 부부의 주수입원은 밭농사와 산나물, 강원도 토속음식이다. 농사는 평야 지대인 경기 광주에서 나고 자란 최씨가 담당하고, 나물 채취와 토속음식은 영월 북면 마차리가 고향인 백씨가 주로 맡는다. 할머니가 약초꾼이었기에, 백씨는 모르는 산나물이 없다.
“우리를 맺어준 건 위문편지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국군아저씨께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그때의 군인이 지금의 남편이에요. 6년간 오누이처럼 편지를 주고받던 중 사랑의 감정이 싹튼 것이지요. 우리 집에 인사오던 날, 엄마가 이 사람 얼굴을 보고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든지…. 아무튼 이 사람은 내 편지를 받던 날부터 강원도에 살 운명이었습니다.”
고추·콩·들깨·참깨·고구마 농사는 북면 두목리에 있는 1600평 밭에서 짓는다. 두목리는 한 사람이 두 사람 몫의 일을 한다고 해서 이름(두몫리) 붙여질 만큼 토질이 좋고 소출이 많이 나는 곳이다. 산나물은 인근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1256m) 정상에 있는 고원 ‘육백마지기’에서 채취한다. 넓이가 600마지기라서 이름 붙여진 육백마지기는 하늘과 맞닿은 별천지로, 최씨 부부는 산나물이 지천으로 깔리는 5~6월에는 아예 육백마지기에서 산다. 토속음식으로는 감자떡과 황둔찐빵을 만들어 판매 중인데, 백씨의 음식 솜씨가 남달라 찾는 사람이 많다.
최씨 부부는 생산한 농산물·산나물·토속음식을 지인들에게 알음알음으로 판매하기도 하지만, 홍익회 쇼핑몰인 ‘홍익스토어’(www.hongikhoe.co.kr)를 통해서도 판매한다. 이들 부부의 제품들은 홍익스토어에 ‘친절한 금자씨’로 입점해 있다. 홍익스토어에 입점한 것도 인터넷 덕분이다. 홍익회 관리자가 백씨의 글을 보고 찾아왔다가 진한 강원도의 맛과 향에 반한 것이다.
인터넷은 황둔 시절에 익혔다. 황둔이 정보화시범마을로 지정된 터라 자연히 인터넷을 접하게 된 최씨 부부는 두어 군데 자연친화적인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리다 지난해 9월 마침내 개인 카페를 개설했다. 날마다 시골 생활의 즐거움이 감칠맛 나게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금자와 감자’의 현재 회원은 170여 명이나 되며 외국에 사는 회원도 있다.

 

“보태기보다 나누며 살자”

“아내가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이곳으로 온 후 건강을 되찾는 모습을 보며 여기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일이 취미가 되고, 취미가 일이 됐습니다.”
만만찮은 밭농사에 산을 타며 나물 뜯고 밤에는 감자떡을 빚는 일이 고될 수도 있지만, 삶 자체를 즐겼기에 최씨 부부는 힘든 줄을 몰랐다. 밭 주변의 야생화, 육백마지기의 밤별, 잊혀져가는 토속음식들을 카페에 소개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귀농 후 마음이 더 넉넉해졌지만, 첫인상대로 최씨 부부는 이천에 있을 때부터 베푸는 걸 낙으로 알던 사람들이다. ‘보태기보다 나누며 살자’는 데 둘의 마음은 너무 잘 맞았다. 결혼 무렵 이들 부부의 꿈은 소외된 노인들을 위해 양로원을 세우는 것. 그때부터 두 사람은 주말마다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목욕을 도와주고 말벗이 되어주는 등 봉사가 체질화됐다.
귀농하고 나서는 젊은이가 없는 농가를 찾아다녔다. 최씨는 무너진 담이나 부서진 집기를 수리해주고, 백씨는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노인들 사진을 찍어줬다. 비용이래야 인화비 조금 드는 게 전부였지만, 시골 노인들에게 사진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렇게 남을 돕고 다니니까 하늘이 축복을 내렸는지 지난해에는 산삼을 여덟 뿌리 캐기도 했다. 일곱 뿌리는 양가 부모님과 큰 병을 앓고 있는 친구에게 나눠주고, 한 뿌리는 자신들이 달여 먹었는데, 산삼의 효험이 좋긴 좋은지 강원도의 겨울 추위가 ‘살기에 딱 좋게’ 느껴질 정도라고 한다.
“앞으로 우리 부부의 계획은 두목리 밭 한쪽에 4~5동짜리 황토집을 지어, 농박을 하며 농사도 경험하고 들꽃도 즐길 수 있는 야생화 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곳은 일상에 시달리는 도시인들이나 앞만 보고 달려온 맞벌이 부부들을 위한 재충전 센터가 될 것입니다.”

 

“어르신들 겨울 사진이나 좀 찍어드리자고”

“마침 우리 웰컴이도 왔으니 육백마지기 설경 구경이나 가볼까?”
“아서요. 앞집 공주네도 서울 조카들 구경시켜준답시고 세렉스 몰고 나섰다가 길이 미끄러워서 되돌아왔대요.”
“그럼 두목리 밭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황둔이나 다녀옵시다. 어르신들 겨울 사진이나 좀 찍어드리자고.”
감자떡 쪄내는 일을 마무리한 최씨 부부는 간편한 차림새로 나들이를 준비한다. ‘웰컴’ 환영이(16)는 최씨 부부의 외아들로, 인천에 있는 한국기독사관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방학이라 잠시 집에 들르러 왔다. 환영이의 별명은 이름대로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웰컴(welcome)’이다.
최씨의 더블캡 4륜구동 트럭은 이내 두목리에 닿고, 밭으로 난 오솔길에는 볕이 들지 않는 탓인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밭머리에 도착하자마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핸드폰을 치켜세우던 환영이는 “전화도 안 터지는 곳에 어찌 들어와 살 거냐”고 투덜대지만, 최씨 부부는 짐짓 못 들은 척 팔짱을 끼고 오솔길을 걸으며 잠시 소싯적으로 돌아간다.
잠시 후 트럭은 다시 황둔으로 향하고, 이제는 내 차례라는 듯 서둘러 카메라를 챙기는 백씨. 지금쯤 황둔 마을회관에는 보나마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을 테고, “나 먼저 찍어달라”는 성화와 함께 어쩌면 군밤이라도 몇 줌 안겨주실지 모를 일이다.
속리산 기슭의 폐교를 단장해 살고 있는 황대섭·김병화 씨 부부는 ‘나무꾼과 선녀’를 닮았다. 황씨는 감언이설로 자신의 계획에 김씨를 동참시켰고, 김씨는 병이 날 정도로 바뀐 상황에 대해 힘들어했기 때문. 하지만 동화 속 이야기와는 달리, 김씨는 잠시 열병을 앓은 후 황씨의 뜻을 좇았다. 
아무리 친환경의 시대라고 하지만, 도시에서 농촌으로 터전을 옮기기란 쉽지 않다. 삶의 무게중심이 타고난 성향이나 살아온 길에서 벗어난다면 누구나 잠시 길을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높은 것은 낮추고 과한 것은 덜고 모난 것은 다스리는 게 자연의 본성이듯, 자연스런 시간의 흐름에 이런저런 가슴앓이들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순응이 일어나고, 그때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여름 내내 북적대던 물놀이 객들이 모두 떠나간 충북 괴산군 쌍곡계곡에는 바뀌는 계절만큼 물소리가 맑아지고 있었다. 속리산 자락의 대표적인 계곡인 이곳은 산수가 아름다워 조선에서 이름깨나 날린 유학자들이 한번씩은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농촌으로 들어온 후 적응 문제로 한동안 좌충우돌했다는 황대섭(38)·김병화 씨(34) 부부는 이 계곡 아래에 있는 낡은 폐교를 단장해 살고 있다. 버즘나무가 아직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폐교의 늦여름 풍경은 무료할 정도로 한가롭다. 참새들의 놀이터가 된 교장선생님의 연단, 이래저래 빛 바랜 반공 소년 이승복 동상, 운동장을 덮고 있는 질경이와 바랭이…. 그리고 버즘나무 그늘 밑 평상에 앉아 이 풍경을 주재하는, 눈빛 선한 황씨와 얼굴처럼 마음도 동글동글해보이는 김씨. 그런데, 얼른 봐서는 모르겠는데, 누가 심한 가슴앓이를 했을까.

 

통장 돈 긁어서 도시로 방 구하러 나가기도

황씨 부부는 1998년 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 마을로 귀농했다. 청주 시내에 살던 이들 부부는 황씨의 출퇴근 문제로 회사(괴산에 있는 모 대기업의 청소년수련원)에서 가까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가, 이후 얼마 안 있어 황씨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자연스레 귀농이 돼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황씨의 의도된 작전이기도 했다. 사실 황씨의 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귀농해 있었다. 괴산과 인접한 경북 문경시 가은읍이 고향인 황씨는 고향 가는 길에 종종 이 마을 앞을 지나다니며 나중에 살 곳으로 눈여겨봐뒀던 것이다. 대학 재학 시절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며 원초적 자유를 누렸던 황씨는 회사 다닐 때도 ‘언젠가는 사고를 칠’ 사람이었다. 그런데다가 회사 시절 노조 활동을 하며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황씨는, 결심이 서자 크게 잴 것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실천했다. 그의 꿈은 현실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고, 그것은 농사였다.
“당시 귀하게 키운 장남이 농사짓겠다고 들어앉자 고향의 아버지가 막걸리 한잔 걸치시고는 70리가 넘는 길을 자전거를 몰고 달려오셨더라요. 미안해서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제길, 농사짓지 말라고 공부시켰더니…’ 하시며 한 숨 크게 한번 쉬시고는 바로 가십디다. 그렇게 해서 부모님께는 용서를 받았지요.”
정작 문제는 아내 김씨였다. 농사일이 하기 싫어 몸이 배배 꼬이는 것도 아니었고 자연의 정취가 싫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변한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나중에는 그게 병이 돼, “너나 인간답게 살아라. 나는 도시 나가서 비인간적으로 살겠다”며 통장 돈 긁어서 청주 시내로 전세방을 구하러 나갈 정도였다.
남편의 수발까지 받던 김씨는 결국 심리 상담사까지 찾게 되었는데, 결론은 억압이었다. 활발히 사회 활동하던 사람이 농촌으로 들어와 허수아비처럼 살려니 당연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크게 앓으면서 조금씩 자신을 추스른 그녀의 결론은 ‘여기에서 답 찾기’였다. 여기에서 일을 벌이고 여기로 사람을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후 다른 귀농자들도 만나고 가톨릭농민회 여성 모임에도 참여하면서 그녀는 가슴앓이를 끝낼 수 있었고, 마침내 자연에 순응할 수 있었다.
“이제는 98%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계속 되는 만큼 긴장감유지를 위해 2%는 남겨둬야지요. 앞으로도 나는 계속 성숙해질 겁니다.”

 

황태 말리듯 곶감 말린다

황씨 부부의 주된 농사는 두릅과 곶감이다. 농장은 고향인 문경 가은에 있는데, 아직은 노련한 농사꾼이 못 되는지라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두릅은 3000평 밭에서 봄 한 철 수확해 판매하며, 곶감은 가을에 작업을 시작해 연간 40∼50개들이(2.5㎏) 1500∼2000상자를 생산한다. 이외 봄·가을을 피해 솔부추도 재배해 유기농 매장에 납품하고 있다.
“애초 귀농과 함께 시작한 농사는 버섯이었어요.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버섯이야말로 온도·습도·환기 3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생초보가 버섯 농사를 우습게 봤던 거지요. 손도 버섯을 다룰 만큼 섬세하지 못했고요. 통장에 돈 떨어지는 것을 보며 ‘돈 가뭄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즈음, 적게 벌더라도 계절별로 돈 되는 농사를 하자는 생각에 봄에는 두릅, 가을에는 곶감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황씨 부부의 농번기는 다른 농민들과는 반대다. 감을 깎기 시작하는 10월 중순부터 두릅이 나오는 이듬해 초봄까지가 가장 바쁘다. 겨울까지 깎고 말린 곶감은 설날을 전후해 모두 나가는데, 모두 알음알음으로 판매한다. 황씨네 곶감의 특징은 동해에서 잡은 명태를 진부령에서 황태로 만들듯, 문경에서 따온 감을 준고랭지인 속리산 자락에서 말린다는 것. 낮은 온도와 큰 일교차 때문에 곰팡이가 전혀 없고 당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농사 외에 황씨 부부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임대한 폐교를 농촌체험 및 농박 공간으로 꾸민 ‘숲속작은학교’. 이 학교는 아내 김씨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자 ‘여기에서 답 찾기’의 현장이기에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숲속작은학교’에는 여름 손님이 가장 많은데, 황씨는 청소년수련원에서 일한 경험을 최대한 살려 참가자들에게 다양하고 알찬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농산물 수확, 감자·옥수수 쪄먹기, 두부 만들기, 황토염색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숲속작은학교는 우리와 외부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한 번이라도 들르신 분들은 모두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지요. 그런데 오시는 손님들에게 딱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농촌에 오실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오시라는 겁니다. 일부 손님들은 밤새 음주가무에 농작물에 함부로 손을 대기도 하는데, 농민들이 한없이 줄 것으로 생각했다가 조금 서운한 말을 들었다고 ‘농촌 인심 변했다’며 손가락질해서야 되겠습니까.”
‘숲속작은학교’는 황씨 부부가 두 딸 솔휘(9)·솔비(5)에게 선물한 최고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솔휘·솔비는 들풀이 잔디처럼 깔린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전거도 달리고, 버즘나무에 걸린 그네에도 오르며 완전 토종으로 자라고 있다.

 

아, 나무꾼이 하나 들어오는구나

마을에 동화하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황씨의 천성이 원체 선해 거절을 못하기 때문이다. 시골 노인들은 차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료 좀 사러가자’, ‘보건소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들을 모두 들어주니 마을 사람들이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례로, 윗마을에 마을 원주민들도 꺼리는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한 명 있는데, 지난해 황씨는 그 할아버지로부터 고맙다며 땅 200평을 공짜로 희사받았을 정도였다.
“결혼 무렵이나 지금이나 눈빛만은 참 선한 남잡니다. 내가 가슴앓이를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저 선한 눈빛 때문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만난 건 내가 다니던 회사에 저 사람이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오면서인데, 그때 ‘아, 나무꾼이 하나 들어오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 어느 날부터 나를 보는 그 나무꾼의 눈빛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큰일났다며 짐짓 당황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저 또한 끌리는 마음은 도리가 없었지요.”
골이 깊어야 산도 높다. 열병 후 새 삶을 찾은 김씨는 “남편 덕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삶을 살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요즘도 가끔 “이제 애 둘도 잘 크고 있고, 일도 할 만큼 했으니 다시 내 옷을 돌려달라”고 말하지만, 남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사랑을 확인하는 농담일 뿐이다.
운동장 너머에 있는 텃밭으로 끝물 오이를 거두러 가는 황씨네 가족 위로 버즘나무 잎들이 하늘거린다. 이제 곧 하늘이 높아지고, 산색이 변하고, 감이 익어갈 것이다. 바야흐로 황씨 부부가 바빠질 계절이다.
귀농, 아름답고 소중한 선택

1998년 늦가을 김영선·안금숙 씨 부부는 세 살, 한 살배기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인제군 가리산 자락으로 돌아왔다. 십여 년 도시살이 동안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던 곳이었다. 귀농해 다섯 해가 흐르고 부부는 자연에게 겸손과 기다림과 여유를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초등학교 일학년 유빈이와 여섯 살 인규에게 자연은 훌륭한 선생님이고 즐거운 놀이터이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산에 오르고, 개울물도 잘 건넌다. 바위를 들치면 가재가 숨어 있고, 북극성은 어디서 찾고, 계절마다 나무 색이 어떻게 바뀌는지, 꽃과 나무의 이름이 무언지도 곧잘 안다.
보일러가 고장 나도, 경운기가 갑자기 서버려도 마을 사람들은 영선 씨만 찾는다. 기계도 사람을 볼 줄을 아는지 그의 손만 닿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돌아간다. 금숙 씨는 마을의 미용사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머리 손질은 늘 그녀 차지. 그렇게 도움을 주고 나면 노인들은 부부의 손에 그 집에서 가장 맛난 것들을 쥐어준다. 부부가 한사코 손사래를 쳐도 노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문득문득 밀려오는 행복
가리산 품으로 돌아온 지 다섯 해. 김영선(35·강원 인제군 인제읍 가리산리)·안금숙 씨(34) 부부는 요즘 문득문득 행복을 느낀다. 지혜롭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 마을에서 자신들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느낄 때, 도시에서는 모르고 지나갔을 자신들의 재능을 발견했을 때,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가족과 마주할 때. 돈 부자는 못 돼도 마음 부자는 될 수 있을 것 같아 부부는 자신들의 귀농이 아름답고 소중한 선택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십여 년 도시살이 동안 늘 이곳을 그리워하며 살았어요. 지금쯤 가리산에는 꽃 향연이 벌어지겠구나. 하늘에는 별이 얼마나 총총할까. 단풍이 또 얼마나 예쁠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늘 가슴앓이를 했지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영선 씨보다 금숙 씨가 더욱 간절했다. 중학교 동창으로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우정을 나누던 부부. 친구로만 여기던 금숙 씨에게 영선 씨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청혼을 했다.
“남편이 중학교 때부터 인제 차부에서 땅콩 과자를 구워 파는 장사를 했어요. 제가 오고 가며 땅콩도 많이 까주었는데, 그때부터 생각했대요. 금숙이처럼 천사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요.”
부부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을 하고 스물다섯에 한 식구가 되었다. 주례도 없이 배를 타고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누우면 꽉 차는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그렇게 결혼 비용을 아껴 모은 돈에 융자를 보태, 결혼한 이듬해 가리산 자락에 5600평 땅을 장만했다. 부모님이 평생 동안 소작을 부치던 땅이었다.
그때부터 부부는 차근차근 귀농을 준비했다. 융자금을 갚고 초기 정착금을 장만하는 데 오년이 걸렸다. 어떤 작목까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하자고 부부는 뜻을 모았다. 그리고 남편은 휴일이면 건설 현장을 돌며 버려지는 건설 자재를 모으고, 배관이며 전기 설비 등 집 짓는 기술도 어깨너머로 익혔다. 그렇게 집 근처 공터에 차곡차곡 모은 자재를 몇 달에 한 번씩 고향으로 날랐다.
그렇게 1999년 늦가을에 부부는 남매를 품에 안고 가리산 자락으로 돌아왔다. 본가에 살림을 꾸리고, 부부는 손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온전히 두 사람만의 힘으로 집을 완성했다. 그렇게 집 짓는 데 들인 돈이 540만 원. 몇 년 동안 건설 현장을 돌아다닌 노력 덕에 헐값에 지었지만, 부부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자연에서 배우는 기다림의 지혜

“이사 온 첫날밤 하늘의 별을 보는데, 어린 시절 보던 그 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예요. 순간 십년 동안 우리가 어디서 헤매다 온 걸까 싶었어요.”
그러나 부부의 귀농 생활이 늘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첫해 부부는 임대 농지까지 빌려 배추를 8000평이나 심었다. 초보 농사꾼으로 하나부터 배우려니 일이 만만찮았다. 씨앗을 뿌리고 김이나 몇 번 매주면 끝나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무농약을 고집하기에는 여러 모로 여건도 맞지 않았다. 제초제는 치지 않고, 농약 치는 횟수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하루 종일 밭에서 종종대고 들어오면 온몸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정성을 들였건만, 그해 배추 시세가 바닥을 쳤다. 수확도 못 해보고 모두 갈아엎어야 했다.
“허탈했지요. 그런데 우리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농사를 짓자고 약속을 해놓고 그렇게 약을 쳐댔으니 결과가 좋을 리가 있겠어요. 이듬해에는 무공해로 콩 농사를 지었습니다.”
콩을 서울의 지인들에게 팔아 그해 거둔 수입이 450만 원. 네 가족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세를 타지 않는 대체 작목을 찾는 게 급했다. 그때부터 교육이라는 교육은 다 쫓아다니고 컴퓨터와 농업 자료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작목이 야콘이었다. 농약과 제초제를 치지 않아도 되고, 희귀 작물이라 시세가 널뛰지 않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콩 농사를 거둔 부부는 야콘 농사를 시작했다. 애초에 결심한 대로 농약은 물론 화학 비료도 주지 않았다. 나무 껍질과 소똥, 인분을 발효시킨 거름을 주고, 일일이 예초기로 풀을 베어냈다. 그렇게 첫 해 300평 야콘 농사를 지어 손에 쥔 돈이 500만 원. 경지 면적에 비하면 소득은 괜찮았다. 그러나 종자를 구하기 어려워 면적을 늘리는 것도 마음 같지 않았다. 지난해 겨울에는 겨우내 눈이 많이 내려 비닐하우스에 저장한 종자까지 대부분 얼어 죽었다. 그래서 150평밖에 심지 못한 데다, 여름내 비가 많이 내려 그나마도 작황이 좋지 않았다.
“온전히 농사만으로 돈을 벌기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도시에서라면 좌절하고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자연이 늘 저희를 다독여주더군요. 돈에 쫓기지 마라.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지라고요.”
이렇게 오년 동안 살다보니 가끔씩 농지 구입이며 건축 상담이며 귀농에 대해 문의를 해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이 빼놓지 않는 질문이 돈을 벌 수 있느냐는 것. 그들에게 부부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돈을 쫓으면 급해진다,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지라는 것이다. 부부는 돈이 행복 지수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내가, 가족이, 이웃이, 자연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이 더없이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가졌더니 큰돈은 아니라도 먹고 살만은 해지더란다. 부부가 일년에 벌어들이는 소득은 어림잡아 삼천만 원. 야콘과 표고 농사로 천만 원, 트랙터 일로 천만 원, 집 짓는 일로 천만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
“며칠 전에 송이를 따러갔어요. 송이는 몇 개 못 땄지만 머루, 다래 따먹고 옹달샘 물 마시고. 얼마나 재미있던지. 도시 살았으면 이런 행복을 어찌 알겠어요. 얼마 전에 마을 분들과 ‘가리산을 우리가 지키자’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깨끗한 환경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어서요.” 글·유재경 기자 | 사진·최수연 기자

‘땅속의 배’
야콘을 아시나요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방이 원산지인 야콘은 우리 나라에는 1980년대 초반에 처음 들어왔다. 그러나 종자 구하기가 쉽지 않고, 대량 번식도 불가능해 아직도 전국적으로 생산 농가가 열손가락에 꼽히는 희귀 농산물. 감자나 고구마처럼 뿌리를 먹는 식물로 포기마다 여러 개의 야콘이 달리는데 고랭지로 갈수록 좋은 품질의 야콘을 생산할 수 있다.
야콘은 줄기와 뿌리 사이에 있는 눈으로 번식을 하는데, 눈을 하나씩 떼어내 비닐하우스 온상에서 싹을 틔운 뒤 정식을 한다. 재배 방법은 비교적 쉬운 편으로 퇴비를 뿌린 밭에 모종을 옮겨 심은 뒤, 곁순을 따고, 풀을 베서 썩도록 놔두면 된다. 4월에 정식해 10월 중순이면 수확을 시작한다. 바로 수확하면 떫은맛이 나므로 한 달 정도 후숙시켜 먹는다. 후숙 후에는 배처럼 시원하고 단맛이 강해진다. 익히지 않고, 과일처럼 껍질을 깎아먹거나 즙을 내 마시는 게 가장 맛있다. 섬유질과 천연 올리고당이 많아 고기 요리에 넣으면 고기의 육질이 부드러워진다.
야콘은 수분 함량이 87.4%이며, 칼슘·칼륨·나트륨·마그네슘 등의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자당의 당도가 15도나 돼 당뇨 치료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섬유질이 풍부해 소화가 잘되고 변비 해소를 돕는다.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와 비만 예방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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