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田園生活)과 장수(長壽)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산촌의 8월은 도시 한복판에서 울리는 경적보다도 나무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더 시끄러운 때가 많다. 천둥치던 먹구름도 한 줄기 소나기만으로 그치면 금시 청정하늘엔 흰구름 둥실 뜨는 일도 잦다. 그러다가 저녁노을 사그라지고 나면 날 저문 하늘엔 가로등 불빛보다 별빛이 더 휘황해진다.
그런 산촌의 8월은 한갓짐 속에서도 풍요로운 것이 많다. 낮의 길이도 길어 열너댓 시간이나 되어 활동하는 길이가 길고, 바람소리 천둥소리에, 풍성한 햇살, 산야를 뒤덮은 녹음 따위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질을 높여 주고 쾌적한 생활을 제공해 줌으로써 인간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요즈음은 도시를 벗어나 산촌이나 농촌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도시의 매연 속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산촌이나 농촌에 들어와 산다고 해서 건강에는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장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개 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산촌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식생활이나 생활 습관이 자연에 동화되고 거기에 순응해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양주의 유명 상표로 ‘올드 파’가 있다. 루벤스 화백이 그린 『토머스 파』 노인의 초상화로 된 상표이다. 상표에 올려진 하얀 수염의 노인은 152세나 산 장수 노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한 농촌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다. 80세에 처음 결혼을 해서 122세에 첫 부인과 사별하자 그 나이에 다시 재혼을 했다고 하니 과히 그 장수했음을 짐작할 만하다. 토머스 파가 그렇게 오래 살았던 것은 태어날 때부터 농촌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마음 편하게 생활한 데서 기인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전원생활로 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결혼해서 자녀들을 많이 낳고 살며 농촌이나 산촌에서 맑은 공기와 풍성한 햇빛과 녹색의 공간에서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자족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잠시도 손을 재고 사는 법이 없다. 늙어서도 자질구레한 일을 쉬임없이 하며 나날을 보낸다. 생활 정도는 그저 그렇고, 먹는 것은 주로 채식 위주다. 5일장이 돌아오면 재래시장에 나가 육류 몇 모타리에 생선 한 손쯤 사다 먹는 것이 고작이다. 그들은 정치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이고 대통령이나 군수, 면장이 먹여 살려줄 것이라는 생각은 애시당초부터 가지지 않고 산다. 매사에 구애 받음 없고 불평도 불만도 없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다.
그들은 조금 모자라는 사람같이, 또 조금 적게 먹으면서, 적당히 일하고, 욕심 부리지 않고 살면서, 부자도 아니면서 가난함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산촌의 전원에는 거개가 등굽고 허리 접힌 노인들이 많지만 새벽닭 울음소리에 아침이 열리고 해 저문 하늘에 성근별이 떠야 하루 일이 마감된다. 그들의 연세가 여든이건 아흔이건 손바닥만 펴보면 구덕살이 박혀 있다. 그 구덕살이 증명하듯 진 날 갠날 없이 손 잰 적 없이 살아온 삶의 훈장들이다. 한평생 산 고개를 넘나들고 논밭자락을 누비면서 자급자족해 왔고,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자식들만은 외지로 내보내 공부시켜 잘 살도록 뒷바라지로 일관해 온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옛날 옛적 흉년에 쑥떡 한 넙뙈기 주고 바꿨다는 쑥떡배미 논 물꼬를 돌아보고 오거나, 아니면 묵정밭 일궈 심은 고구마 넝쿨 걷어 주고 동구 앞 가로질러오다가 춘삼이의 증조부가 심었다는 정자나무 그늘에 잠시 쉰다. 뜨거운 뙤약볕도 정자나무 그늘 아래선 소주 알바람처럼 시원하다. 거기에는 먼저 와 앉은 건너마을 노인네 몇 분도 있다.
“많이 기다렸는감?”
“기다리긴, 이제 나온걸. 자, 그럼 가 보세들.”
펼쳐도 가물가물해 잘 보이지 않는 성경책을 저마다 들고 교회로 간다. 세운 지 얼마 안된 교회에 새로 온 목사가 하도 권해 나가게 된 노인들이다. 보리암이나 천수암에 봄바람 쐬러 갔다가 보살님의 권유로 부처님께 절 몇 번 한 것이 신앙의 전부였던 노인들은 역시 가까운 예배당도 기도만 하면 천당 간다는 말에 귀 솔깃해 나가지만 목사님 설교보다 점심 한 끼 걸치는 게 좋아서 일요일을 기다렸다 다녀오는 노인네들이다.
신도들이라 해봤자 아이 어른 남녀 섞어 모두 스무나문 명에 불과하지만 찬송가 소리만은 드높게 울려 퍼진다.
“내 본향 가는 길 저기 있네. / 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고 / 주님이 날 오라 손짓하며 부르니 / 내 앞의 소망은 오직 저 길 / -중략- 생명의 면류관 나 받겠네” (딤후4:7-8)
그들에겐 믿는 마음 약해도 찬송가를 부를 때만은 콧등이 찡해지고 알지 못할 감동에 눈시울이 적셔지는 때도 있단다.
그것이 바로 순박하게, 천심(天心)으로 살아온 산촌 사람들의 종교요, 그래서 오래오래 사는 비법인지도 모를 일이다.
산촌에 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같은 노인네들은 도시 노인들과는 다르게 이마나 눈가에 덕석 같은 주름살이 많다. 그래도 나이 더해지고 주름살 는다고 신경 쓰며 살지 않는다. 성인 공자도 잔주름 지는 것이 싫어 이마와 눈언저리를 잠들기 전 스무 번씩 문질렀고, 피부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네로 황제 부인 포페아도 당나귀 젖으로 주름살 예방에 신경을 기울였다지만, 산촌 사람들은 백발이나 잔주름을 삶의 자국으로 생각하며 오히려 면류관(冕旒冠)처럼 여기고 산다.
진실한 삶의 향기는 인위적이고 가식된 외모에서 풍기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대로 살면서 세월 따라 변하는 모습으로 자기답게 사는 방식에서 풍겨지는 것이라 여겨서일까.
그렇게 사는 촌로들은 세상사 근심걱정 없으니 가슴으로 눈물 적실 일도 없고, 산등성이 너머로 사위는 저녁노을이 어둠에 밀려 하늘 가장자리에 걸렸어도 인생의 황혼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에 짓눌려 사는 법도 없다.
산달이 수리봉에 걸리면 저녁인가 여기고, 새벽별 사라지고 닭울음소리 들리면 아침이 열리는구나 여길 뿐이다.
태어날 때나 지금이나 아니,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흐르는 세월도, 부는 바람도, 자글거리며 쏟아지는 햇살도 똑같음을 알고 산다. 그런 삶에서 전원에 사는 사람들이 여느 사람들보다 장수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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