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와 별과…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장마 끝의 햇살은 유난히도 환하다. 특히 산촌의 하늘은 더욱 그렇다. 7월 햇빛이 녹음 냄새를 섞어 자글자글 쏟아지고 있다.
이육사의 시처럼 ‘청포도가 익는 계절’이 아니더라도 내가 사는 산촌은 머루, 다래 영글고 ‘햇사레 복숭아’가 볼을 붉히는 계절이 된다.
장마 끝난 대지에 내리쬐는 두꺼운 햇살은 끓는 지열과 더불어 아지랑이로 피어나고, 만 가지 살아 있는 것들의 왕성한 활동의 무대로서 그만이다.
천지간에 깔린 푸르름을 손으로 움켜쥐면 연신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7월의 산촌이다. 그런 산촌에도 황홀한 슬픔이 아니면, 사랑의 슬픔 같은 아픔이 잦아듦은 뭣 때문일까? 그것은 간간 부쳐져 오는 사별의 소식들 때문이기도 하다. 아내의 친구가 그렇고 나 또한 친구의 부음을 받는다. 해가 더해질수록 그런 횟수는 더해만 간다.
그래서 까치가 재작거리고 종다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라 지저귀지만 조금도 즐겁다거나 행복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아마 이런 때를 일러 살아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독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럴 때면 영락없이 아내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서편의 저 달이 호숫가에 질 때면 /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 / 사랑 빛에 잠기는 빛난 눈동자에는/ 근심 띤 눈빛으로 편히 가시오. / 친구 내 친구 어이 이별할까나. / 친구 내 친구 잊지 마시오.

한때 병고로 사경을 헤매었을 때를 생각해서인지 이렇게 슬프도록 적요로운 날엔 흔히 애조띤 「고별의 노래」를 부르는 아내였다.
나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 아내를 곁에서 모른 체하며 옆모습을 지켜만 본다. 그도 한때는 뭇남성의 시선을 모았을 눈부신 청춘이 있었겠건만 지금은 가냘프고 애처로운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나 또한 아내에게 다 늙은 영감탱이로 보일테지만.
아, 그녀는 평생을 나 하나만을 지켜보며 살아온 지난 추억 에돌아 보매 불행도 아닌 것이, 행복도 아닌 것이 하나의 친구로, 반려자로 기대고 의지해 살아왔는데, 이젠 ‘서편의 달로 호숫가에 지는’ 것처럼 인생황혼기에서 언젠가는 각각 돌아서야 할 것을 생각해 저리도 가슴 저며가며 고독을 씹는지도 모를 일이구나.
나 혼자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려 본다.
불과 십 년 전 산촌생활을 원해 산골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름 없는 여인’으로 남은 인생, 전원에 묻혀 살고파 했는데. 흡사 노천명의 시 같은 삶을 원했었는데.

어느 조그마한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여우 나는 산골 이야기를 하면/삽살개는 달을 짖고/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아내는 원대로 산골로 들어갔다. 텃밭 가에 오이, 호박에다 박넝쿨도 올렸다. 반원 같은 아치 위에 들장미도 올렸다. 잔디 가지런히 자란 마당에는 하늘도 내려놓고 별도 불러댔다. 아니 멀리 충북선에서는 대전발 제천행 기차 소리가 들린다. 삽살개 대신 꼬리 없는 동경이가 달을 보고 짖는다. 그런 산골에서 ‘당신과 함께 하니 여왕보다 더 행복하다’고 했다.
그랬던 아내가 산골을 떠나 서울 아파트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몸 늙고 마음 늙음에 산촌 생활이 불편하다며 서울로 가잔다. 할 수 없이 산촌과 도시를 오가며 산촌생활 반, 도시생활 반으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서울서의 아파트 생활은 그 나름대로 편했다. 춥고 더움은 물론, 바람 불고 비 온다 한들 설거지 걱정할 필요 없고, 병 나 아프면 큰 종합병원 기라성같이 널려 있으니 오죽 좋으냐고 여겼다. 그래도 한 주를 못 넘겨 시골 다녀오기를 조른다. 그러면 준비도, 예고도 없이 산촌의 농막으로 달려간다.
산촌에는 기다려 주고 반겨 주는 것이 많다. 아내가 아침저녁 잡풀 뽑아 가꾼 앞마당의 잔디밭이 그렇고, 넘어지면 코 닿을 텃밭에 손발 안 아끼고 가꾼 농작물 모두가 제철 만나 자라고 있어 반갑다.
“꿩꿩꿩 푸드득” 콩밭에 내려앉았던 장끼의 울음소리나, 안개 내린 산자락에 숨어 “풀꾹풀꾹 계집 죽고 자식 죽고 서답빨래 누가 할꼬 풀꾹풀꾹” 어쩜 청승스러우리 만큼 울어젖히는 뻐꾸기의 한스런 울음마저도 정다운 곳이 산촌이다.
우리 내외 한마음 되어 하루 종일 콩밭, 고추이랑 풀매고, 과수원 풀 깎다 보면 하루해가 저물어 저녁노을 물든 하늘가에는 벌써 성근 별이 뜬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뜰아래 놓인 평상에 앉아 별빛 찬란한 하늘을 우러러 본다.
은하수에 오작교(烏鵲橋)가 놓여진다는 칠월 칠석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꼭 한 번씩 만나도록 지상의 까막까치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는단다.
견우와 직녀는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를 징검다리로 삼아 노둣돌 밟듯 건넌다. 그것이 오작교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단 한 번만 만나야 하는 애달픈 사랑을 이루도록 까마귀와 까치가 헌신 봉사한다는 아름다운 전설. 그 칠석날 밤을 생각했는지 산촌의 밤하늘을 바라보던 아내는 무슨 생각에선지 눈물 그렁한 눈망울로 고개를 떨군다.
견우와 직녀의 애달픈 사랑이 아내의 가슴을 눈물 젖게 해서일까.
우연찮게도 칠석날 밤이 지나 다시 산촌에 찾아온 까막까치의 머리는 흡사 항암주사 맞은 암환자의 머리처럼 ‘속알머리’가 없다. 견우직녀의 발을 받쳐 주느라 깃털이 빠져서란다. 그런 까치를 음성군의 상징새로 지정해 뒀지만 요즈음에 와서는 농작물을 하도 해쳐대는 통에 애물단지로 전락했지만….
산촌에서 올려다보는 7월의 밤하늘은 높고도 맑다.
오작교 놓인 은하수에 별이 잠겨 있고, 마디 없는 시간은 천년만년 바람에 묻어 흐른다. 어지간히 밤이 깊었는지 수리봉에 산 달이 걸려 있다.
이슬이 내리는지 밤공기가 서늘하다.
“ 자, 그만 방으로 듭시다.”
잠자리에 누워도 여전히 창으로 번져드는 별빛은 여전하다. 견우와 직녀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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