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 묻혀 사는 뜻은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추사(秋史)나 완당(阮堂)으로 기억되기 일쑤인 김정희는 정쟁에 말려 십 수 년을 섬과 한촌(寒村)에서 유배생활을 보내다가 고희(古稀)를 넘긴 인생의 말년에 광주 봉은사에 기거할 때 마지막 자신의 호를 지었으되 노과(老果)라 했다. 노경에 들어서 병고에 시달리며 환란의 세월을 보냈지만, 춘풍세우 보내고 엄동설한에도 늘푸른 송죽으로 버틴 삶을 볼 때 ‘향기 나는 늙은 과일’의 뜻을 지닌 ‘노과(老果)’란 호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제구실을 못하고 정쟁의 환란만이 난무하던 세상을 빗겨나 심산유곡 절간에 묻혀 시와 서화에 몰입했던 노과의 심정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오늘날 시멘트로 쌓아올린 빌딩숲이 들어찬 회색의 도시는 햇볕 한 줌, 바람 한 점 제대로 얻어 걸치기 어렵고, 신선한 공기 한숨 들이켜기 힘들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도시인들은 콘크리트 구조물에 갇힌 삶에 이골이 나서 도시를 벗어나 전원(田園)으로 들어가고자 안간힘을 쓴다.
나도 시멘트문화에 진력이 나고,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아귀다툼하는 사람들에 지쳐 산촌을 찾았고, 그래서 청산에 묻혀 산다. 하지만 청산에 묻혀 산다고 해서 누구나 자유스럽고 행복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이 이르는 곳에 청산이 있듯이(人間到處有靑山), 사람 가는 곳에 사람 있기 마련이라 듣고 보는 것 또한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더라.
골목길 밟고 다닌다고 해서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건만 십년을 하루같이 앞뒷집에 살면서 “골목길이 내 땅이니 다니지 말라” 하면 “너는 왜 남의 밭둑 타고 다니느냐”고 아귀다툼이다. 신접살림 나간 춘삼이네가 자경(自耕)하는 과수원 옆에 농가를 마련하고는 군청에다 골목길 진입로 포장을 요구해 예산이 나오자 이장이 가로채서 자기 밭 농로 포장을 먼저 해버렸다. 며칠이 안돼서 이장이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죽자 “지옥에 먼저 가려고 저승길 포장했네.” 하고 춘삼이네가 빈정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산촌생활의 풍경은 눈으로만 보고 느끼고 즐겨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보고 살피고 느껴야 한다. 산촌은 단순히 공기 맑고 꽃 피고 산이 있어 평화롭고 순박한 삶의 장소가 아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노자가 말한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은 다툼이 없다. 그저 흐를 뿐이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는다. 생명력이 없어진다. 물이 흐름은 순리다. 물은 자연이다. 물과 같이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야 청산에 묻혀 사는 의미를 지닌다.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산촌은 바람이 있음을 잎새 흔들리는 모습으로 알고, 스쳐가는 소리로만 알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우주의 섭리가 융화된 데서 삶의 향기가 풍기고 생명 있는 것들의 숨소리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산촌 생활의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마치 화가 우첼로와 그의 아내 이야기에 비견된다.
우첼로가 ‘원근법(遠近法)’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조용히 다가와 침실로 가자고 말한다. 그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우첼로가 외친다.
“원근법아, 너 참으로 사랑스럽구나!”
이 말에 아내는 소리친다.
“원근법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계집이냐?”
우첼로의 아내는 남편에게 달려들며 바가지를 긁었다. 엘케폰 라치포스키 著 노성두 옮김 「원근법아, 너 참 사랑스럽구나」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다.
우첼로의 깊은 사색과 마음의 감동, 그 반대로 눈과 귀로만 듣는 아내의 표피적인 감정의 표출이 너무나 대조적이듯 눈에 비치는 것과 마음에 비치는 것은 이토록 다른 것이다.
유월 청산의 화기(和氣)찬 만물에 햇살이 쏟아지듯 떨어질 때 잠시 돌베개 베고 나무 그늘에 누워 오수를 즐겨 보라. 새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까지 귀청을 어지럽힐 터인즉 길고 짧은 세상만사 화살처럼 가버리고 후미진 산촌의 공산에는 어느 사이 하루해가 저물어 달빛만 유유히 흐르리라.
자연은 침묵하고 있어도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사람 사는 세상이나 다를 바 없다. 양분과 물을 빨아올리고, 잎 틔우고 꽃 피워서 열매 맺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종족을 퍼뜨려서 대를 이으며 나서 자라고 사라짐을 반복한다. 이같이 세상 만물이 태어나고 사라짐이 신의 섭리인 줄 알면서도 부질없는 인생에 빈부, 귀천, 명예, 권력, 지위의 높고 낮음 모두가 일시적 외모단장에 불과한 것이지만 죽는 날까지 그 하찮은 것들에 미련을 못 버리고 사는 게 우리 인간이다.
부질없기 짝 없는 이름 위에 한 목숨 걸고 부질없이 살다 가는 삶의 마지막엔 “인간의 탈을 벗고 푸르른 하늘을 올라갈(脫人傀儡蒼蒼) 수만 있다면 오죽 좋으랴. 기온이 날로 오르면서 녹음방초가 하루 다르게 짙어간다.
삼간초옥 문 열고 바깥 나서면 숨죽여 울던 풀벌레 소리도 멈추는, 적요로운 청산에 통하는 거사 어찌 사람뿐이랴. 초목과도 마찬가지일터.
청산에 묻혀 빈 마음 풀어젖히고 사노라면 비록 첫 만남의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서로 기쁨 주고 고뇌 나눌 자 어찌 없으랴.
여름 비 한 줄기 지나 계곡물 졸졸거릴 때 물 가둔 웅덩이에 낚싯대라도 드리워 놓고 이웃 불러 부추전에 막걸리 한 사발 나누어 마시노라면 물 고인 수면 가득 소금쟁이 맴돌며 뭉게구름 데불고 희롱이 한창이기 예사이다.
이런 풍광을 일러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했던가. 그래서 오늘도 청산에 묻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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