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생태맹(生態盲)
글 / 조진태 (소설, 동화작가)

해마다 5월이 오면 온통 활기 넘치는 산야를 바라보며 행복 넘치는 정서를 만끽한다.
풀이 있고, 나무가 있고, 맑은 공기가 있고, 따뜻한 햇볕이 있고 물과 흙이 있는 산촌의 삶에 끝없는 행복감에 젖는다. 도시를 벗어난 삶에서 오는 희열감도 더해진다.
콘크리트 문명으로 도시는 온통 회색 칠갑이다. 그 속에서 나서 자라고 생활하는 도시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모른다. 사람의 삶과 자연을 전연 별개의 것으로 여긴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화합하고 교감하면서 상호 의존하고 보호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식물은 풀과 나무일 뿐이고, 공기는 숨을 쉬는 데, 물은 마른 목을 축이는 데, 햇볕과 빛은 따스함과 밝음으로 인식할 뿐이다. 꽃을 보되 단순히 형형색색으로 핀 아름다운 꽃으로 여긴다. 그러나 붉고 노란 꽃의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꽃의 종류, 피는 시기, 서식장소, 모양, 색깔, 번식 정도의 상식은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나무를 숲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개나리, 진달래, 명자, 후박, 수수꽃다리, 이팝, 병꽃, 배롱나무 같은 이름쯤은 알고 살펴볼 수 있는 눈은 가져야 할 것이며, 피는 꽃 모두를 그저 ‘꽃’이라고만 여길 것이 아니라 목련, 철쭉, 황매, 석류, 산사, 남천, 부용, 협죽, 동백, 능소화 정도의 이름들을 알아야 하고, 지저귀고 우는 것들이 모두 ‘새’인양 말할 것이 아니라 참새, 두루미, 황새며 뻐꾸기, 고니, 딱따구리, 올빼미 같은 이름을 알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그들은 인간과 공존함에 있어서 인간에게 정서적이거나 실리적 생활면으로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자연계의 미물일지라도 그들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끝없는 봉사와 기여를 해준다.
이들은 모두가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상호작용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생명체는 햇볕을 쬐고 내리는 빗물을 먹고 자라며, 그리하여 신선한 공기를 내뿜고 머금었던 물을 흘려 우리 인간에게 도움을 주게 되므로 우리들 역시 그것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자연에 관하여 너무나 무지하다. 글(文)이 있음을 알고는 있되 그것을 읽고, 써서 우리 생활에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문맹자(文盲者)라 일컫는다. 컴퓨터를 가졌으나 그 활용법을 알아서 일상생활화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컴맹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가치를 모르고 그 생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생태맹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세대치고 문맹이나 컴맹은 없어도 생태맹이 아닌 자 그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어쩌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촌을 찾아온 젊은 부모나 아이들은 새소리, 벌레소리, 빗소리, 잎 틔우고 움트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감탄할 줄도 모른다. 그저 꽃이고 잎이고 나무인 것으로 여길 뿐이다. 그들에겐 사교육비가 몇 조원이 들건 영수(英數)과외 한 시간 빠지면 숨이 멎고, 미술학원·피아노학원을 다니고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에 빠진 것을 무슨 천재인양 자랑이 늘어진다.
모처럼 나들이한 산촌의 텃밭에서 한참 무성히도 자란 땅콩 밭이랑에 앉아 노랗게 핀 땅콩 꽃을 보는 아이들은 꽃 핀 자리에 언제 땅콩이 여느냐고 묻는다. 쌀이 쌀나무에서 열리고, 감자가 감자나무에서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아이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줄 생각보다는 그저 웃고 넘기며 그것 알아 뭐하느냐는 태도의 젊은 부모들이다. 이들이 진작 생태맹이란 무서운 병에 걸렸음을 안다면 산촌을 찾아 주말 하룻밤이라도 묵으며 자연의 신비스런 생태를 좀더 살펴보아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생태맹인 사람이 비단 도시 사람만인 것은 아니다.
한평생을 산촌에서 자연에 의지해 살면서도 자연의 고마움을 모르는 생태맹 환자들도 많다. 요즈음 천정부지로 치솟는 유가(油價) 탓으로 겨울이면 석유 대신 나무를 땔감으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인근 남의 산에 몰래 들어가서 수십 년 된 나무를 함부로 베어다 화목으로 쓴다. 그것도 연기 덜 나고 화력 센 참나무를 골라 벌목을 하는 것이다. 오십 년도 더 자란 참나무를 거리낌 없이 마구 벤다. 그런가 하면 산자락에 일군 밭을 늘리기 위해 낙락장송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베내고는 손바닥만한 밭을 늘린다. 생태맹에 걸린 환자들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득에 연연해 자연 생태계가 주는 장기적이고 거대한 이익은 보이지도, 볼 줄도 모른다.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먹이사슬의 질서와 끊임없이 계속되는 순환과정에 대한 파괴가 곧 인간에게 자멸이라는 비극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올해도 5월은 왔다. 그래서 산야는 푸르고 맑고 깨끗하다. 그 맑고 깨끗하고 푸른 산야가 주말이면 도시인의 나들이로 뒤덮인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다래, 두릅, 음나무 등이 수난을 당한다. 순을 모조리 따가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버리고 간 오물이 보를 이룬다. 그래서 자연 생태는 생태맹에 의하여 파괴되기 마련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자기가 스스로 돕지 않을 때 누가 도와줄 자 있을 것인가.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이 있다.”는 말도 있다. 자연에게도 주는 것이 있어야 혜택을 볼 수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있는 사해는 죽은 바다이다. 요르단 강으로부터 맑은 물을 받기만 했지 내보내지 않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주고받는 상호교류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서로 발전할 수가 있다. 남쪽만 도와주고 북쪽은 받기만 한데서야 어찌 남북관계가 원만해질 수 있겠는가. 도움이란 물질만을 의미함은 물론 아니다. 북이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면 고마운 마음이라도 도와준 남쪽에 보내 주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한 데서 남북관계는 어렵고 통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세상사 모든 것은 질서와 순리에 따라야 하고, 보호해 주고 보호받는 상호관계에서 생존의 원리를 찾고 순응해 가야 할 것은 당연지사다.
산촌의 한 해는 그야말로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만큼이나 계절 따라 순리 따라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을 거역하고 생태계를 파괴한다면 인간의 삶에서 행복을 누리기란 어려울 것이다. 따스하고 맑고 푸른 오월 하늘 아래 벌과 나비가 수많은 꽃들을 누비며 날고 있다. 꿀을 먹기 위해서다. 벌, 나비도 꿀만 먹는 이기주의자는 아니다. 꿀을 먹는 대신 꽃가루를 날라주어 열매를 맺게 하여 준다. 새들은 나무열매를 따 먹고 그 씨앗을 퍼뜨려 준다.
“너희들 이리 오너라!” 부모 따라 봄나들이 온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이걸 보렴. 이건 느릅나무이고 저건 층층나무란다.”
“이 나무는요? 저 나무는요?”
“ 그건 헛개나무이고, 저건 보리수나무이지.”
“여기 심어 놓은 풀들은요?”
“그건 풀이 아니라 꽃이란다. 함박꽃, 벌개미취, 꽃창포, 붓꽃, 원추리, 꽃잔디, 할미꽃, 옥잠화….”
아이들은 흥미롭고 신이 났지만 젊은 어머니들은 심드렁히 여긴다. 그 따위 알아 뭣하겠느냐는 표정이다.
다행히도 오월 하늘처럼 맑고 밝은 아이들의 표정에서 다시 한 번 산촌생활의 즐거움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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