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눈, 잎눈트는 소리에 산촌이 시끌시끌

글 / 조진태 (소설가, 아동문학가)

 

내가 사는 작가원(作家苑)의 4월은 배시시 웃으며 꽃눈, 잎눈이 한꺼번에 터지는 소리에 시끌시끌해진다. 자작나무에는 수액 채취가 끝날 무렵이 되면 가지마다 연록색 잎눈이 튼다.
벚나무 가지마다 팥알만큼이나 주저리 맺혔던 꽃눈도 서로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겠다고 수선스럽다.
꽃망울을 제일 먼저 터뜨리기야 샛노란 복수초가 제일이라, 산자락이나 밭 언덕 아래 아직도 잔설이 하얗건만 출렁거리는 아지랑이 데불고 따스한 햇살받이에서 철모르고 꽃망울을 터뜨린다. 잔설 속에 언제 피었던가 싶게 복수초 꽃이 지고 나면 이어 매화꽃이 피지만 역시 봄소식은 한참 있어야 온다.
봄의 화신을 전해 주기론 뭐니 뭐니 해도 개나리와 함께 피는 생강나무꽃이 먼저요, 그 다음이 분홍색을 자랑하며 생글생글 웃는 진달래꽃이고 철쭉꽃이다.
이맘때가 되면 이월달 영등바람과 더불어 지친 걸음으로 왔다가 피는가 싶지 않게 낙화되고 마는 자리에 녹두알 같은 열매를 달게 되는 살구 또한 봄의 전령사라 할까. 파릇하게 바늘끝 같은 잔디가 기지개를 켜면 그 틈바귀를 비집고 상사초가 그 늘씬한 몸매로 꽃대를 뽑아 올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헤죽헤죽 웃는다. 상사초는 언제나 화엽(花葉)이 불상봉(不相逢)이다. 구중궁궐의 여인 같은 수려한 자태의 꽃을 자랑하다 시들고 나면 한참 있어야 잎이 돋아나기 때문에 잎과 꽃은 영원히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을 산촌생활에서 나는 눈여겨보아 왔다.
묘목을 사다 심은 지 올해로 쳐서 8년째 되는 백목련 두 그루는 지난해 가을부터 겨우살이를 하느라고 솜이불을 둘러쓰고 누에고치만한 꽃눈이 잎눈을 뒤로 밀치고 제 먼저 화려한 꽃잔치를 벌인다. 그러면 마당 끝 돌담 옆에 서너 해 전에 심은 산수유가 서늘한 눈빛으로 목련꽃이 하는 짓을 유심히 바라본다.
장독대 옆에 몇 포기 뿌리 내린 접시꽃이 겨울을 용케 이겨 내고 벌써 서너 치나 키가 자라 있다. 얼마 안 있어 황토방 토담 곁 십 년이 넘게 자란 다래 덩굴에선 새순이 자 가웃쯤 뻗어갈 것이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나무에서도 새순이 돋고, 반송 또한 가지 끝 송홧가루가 봄바람에 폴폴 날게 될 것이지만, 그 때까지도 꽃눈은커녕 잎눈 하나 틀 생각 않는 게 대추나무이다. 그런데 과일나무 중에서 열매가 먼저 굵어지는 것이 대추 열매다. 하기야 꽃잎 떨어지고 봄 가기 전에 열매 거두는 것이 매실이고 앵두인 것을 보면 생명 가진 것들의 삶에는 저 나름의 방식이 있을 터이다.
산촌의 4월은 확실히 분주하고 수선스럽다. 싹트고 움트는 소리,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 꽃눈트고 잎눈트는 소리, 나비 날고 벌 날아 윙윙거리는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경운기 소리, 트랙터 소리…. 그런 소리 속에,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가 꿈틀거린다. 그리하여 꽃핀 자리마다 열매가 열리고, 잎눈튼 자리마다 이파리가 싱그럽다.
외롭게 절개 지킨 여인 같은 황백색 창포꽃이 연못가에서 수줍게 피면 선비 같은 남색 붓꽃이 점잖게 지켜보는 모습 또한 이곳 산촌의 봄 아니면 어찌 볼 수 있으랴.
올해도 편서풍을 타고 황사가 잦을 테지만 봄비가 내리면 황사도 가라앉을 것이고 대지는 촉촉이 젖어 삼라만상이 약동하게 될 것이다. 농장 한귀퉁이의 실개천 옆에 파놓은 물웅덩이에도 춘수(春水)가 가득히 찰 테고 그러면 기르는 물고기도 살맛나겠지.
올해도 할일이 많다. 우선 밀림처럼 빽빽하게 밀식된 주목나무도 옮겨 심어야 하고, 작년에 옮겨 심은 은행나무, 사과나무, 배나무에는 퇴비를 주고, 전지도 해주고, 풀도 깎아 주어야 할 것이다.
밭둑 따라가며 옥수수와 호박 심고, 건너 동네 윤씨네 관리기 빌려다가 밭갈이해서 일찌감치 고추모를 내야 한다. 집 가까운 텃밭에는 상추씨, 열무씨를 뿌리고, 오이, 가지, 부추도 심고 가꿀 일이다. 토질 좋고 습기 많은 땅에는 토란을 심고, 울타리, 돌담 가에는 수세미며 울콩 심고, 더덕 씨 뿌리는 일도 잊어서야 되겠는가.
산촌생활에서 일 년 중 가장 살맛나고, 바쁘고, 즐겁고, 신명나는 때는 봄의 중간이 되는 4월이다. 따스한 햇살이 그렇고, 포근한 바람이 그렇고, 촉촉이 내리는 이슬비에, 꽃 피고, 잎 피고, 새 울고… 생명 가진 것들 모두가 아우성치는 그런 것들 때문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어느 누가 말했다지만, 반대로 ‘4월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달’임을 산촌에 와서 살아 보면 알게 될 터이다.
산촌생활에서 호사스런 별장이나 짓고 음풍영월하며 허송세월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면, 확실히 4월 한 달은 ‘번개처럼 지나가는 세월’임을 실감할 것이다.
동트는 아침인가 싶으면 어느 사이 저녁노을이 일고 땅거미가 소리 없이 내린다.
봄에 뿌리는 씨가 있어야 가을에 거둘 것이 있기에 봄은 가을보다 더 분주해야 하는 것이다.
4월의 햇살은 아무리 가려도 피할 길이 없다. 더구나 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온 몸에는 땀이 흘러 옷이 젖기 마련이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볕가리개의 모자도 벗고, 윗도리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일하는 게 예사여서 며칠 안 가 얼굴이 까맣게 타기 마련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 내외는 봄 일을 대충 끝내 놓고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해마다 이맘때면 다녀가라는 막내 내외의 닥달에 못 이겨 미국 씨애틀행 비행기를 탄다.
그럴 때면 으레 기내 식사를 주문 받기 위해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영어로 묻는다.
“어떤 종류의 식사를 하겠느냐?”고. 그러면 “계란덮밥 하나와 돈까스.” 하고 한국말을 하면 스튜어디스는 깜짝 놀라곤 웃는다. 아주(亞洲)빛 피부색깔로 중동 아니면 아프리카인으로 착각한 게 미안해서일게다.
그렇게 햇볕에 그을린 피부색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을 나야 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하여튼 산촌은 4월과 함께 생명 있는 것들의 각축장으로 시끌벅적한 곳이다.
그런 삶의 함성을 들으면서 ‘이 달의 행사판’에 빼곡히 적힌 일을 하노라면 해지고 달뜸도 잊은 채 봄날은 간다.

'생활의 지혜 > 창고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화꽃이 필 때  (0) 2008.12.16
빨간 지붕의 아담한 집  (0) 2008.12.16
자연 생태맹(生態盲)  (0) 2008.12.16
청산에 묻혀 사는 뜻은  (0) 2008.12.16
오작교와 별과…  (0) 2008.12.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