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이 필 때
글 / 조진태 (소설가, 아동문학가)



그 때도 2월이 다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아직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산장에 꽃이 피어 있었다. 매화꽃이었다.
거년에 따서 말린 매화꽃잎을 다관에 우려 놓고 모처럼 찾아온 손님들과 마주 앉았다. 망울지고 방긋 벌은 매화꽃 한 가지도 꺾어다 찻상 위에 놓았다. 쌉싸래한 향기가 돈다. 다향인지 꽃향긴지 구별 못할 향이 방안 가득 찬다.
바깥 날씨는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이다.
아직도 봄이 오려면 한창 있어야 하지만, 햇살 두꺼운 전원의 한낮은 아롱거리는 아지랑이가 보름새 명주실같이 보드랍게 솟아오르는 굴뚝의 연기와 함께 하얀 공간에 무늬 놓는다. 이곳이 산촌이라 해도 도시에서건, 산촌에서건 살아가는 삶에는 아무런 유별날 것이 없다. 다만 다를 것이 있다면 부딪치거나, 소리치거나, 사람 가려 가며 살 아무런 이유가 필요치 않은 삶의 장소로서만이 산촌이요, 생활일 뿐이다. 오늘 서울 사는 친구들에다 마을 건너 귀농한 친구 몇이 우연히 모였다. 술 즐기는 친구는 술잔을 들고, 그렇지 못하는 친구는 매화차를 마신다.
이들과는 서로, 언제, 어디 있든 안부를 묻지 않아도 속내를 훤히 알 수 있는 스스럼없는 친구들이다.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 그 세월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애오라지 외길 교직에서 한 생을 살아 왔던 친구들이다. 모두 정년 퇴직한 지도 오래다. 그들이 온다는 소식이 올 때마다 우리는 비 들고 청소하기를 잊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물 뿌리고 쓸고 닦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즐거움이었고 그들을 대하는 예(禮)로 생각해서다. 들어오는 길과 주차할 마당과 집 도랑을 말끔히 비질을 하고 물을 뿌려 두고 그들을 기다린다.
오겠다는 친구들은 서로가 숨기고 가릴 것이 없는 사이들이라 툭하면 내가 사는 농막으로 모여 든다. 그래서 3박 4일쯤은 예사로 묵었다 간다. 그들이 온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레고 떠나는 석별에 서운함과 애달픔이 늘 서려지는 친구들이다. 이들과는 그런 연유들로 해서 자원방래(自遠訪來)한 내객이었다.
나보다 한두 해 늦게 건너 마을에 귀농해 와 사는 친구 S가 이야길 끄집어낸다.
“내 옆집에 사는 이 마을 토박이 Y씨가 상처(喪妻)를 한 거야.”
“저런, 나이 몇인데?” 서울 친구 B가 물었다.
“아마 일흔은 됐을 거야.”
“헌데?” 또 B가 채근을 했다.
“현모양처로 한평생 남편을 도와 농사하고, 자식 교육 시키고, 넉넉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복숭아 수확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지고 만 거지. 그러니 아내를 잃은 Y씨의 마음이 오죽이나 했겠어. 그렇다고 같이 죽을 수도 없는 일.”
“그야 그럴테지.”
“그런데 사람 마음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가 죽고 묘 등에 풀도 자라기 전에 Y씨가 재혼을 한 거야.”
“허허, 무정한 사람!”
“이웃 마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서울서 10년 연하의 여인을 데려온 거야. 뭐, 3천만 원에 1년 거치 3년 상환으로 데려 왔다나? 요즘 재혼 생활에 깨가 쏟아지다 못해 합방 1주일 만에 두 번이나 엠뷸런스에 실려 갔다더군.”
“하하하하, 호호호….”
모두가 박장대소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서로가 막소주에 담근 매화주를 잔이 넘치게 따랐다.
“자 자, Y씨를 위한 축배를! 그리고 우리 노년의 건강을 위하여!”
다 함께 술잔이 아니면 찻잔을 들어 브라보를 외쳤다.
이 모임 가운데는 유일하게 아내를 자주 찾아오는 K여사가 있는데 전직 기자출신답게 정보가 빨라 읍내 소식을 도맡아 전해 준다. 군청 모 과장은 지난 연말에 남은 예산 처리하느라 어느 개인 진입로에 시멘트 포장해 주고 몇 십만 원 챙겼다는 둥, 아무개 여편네는 제 남편은 365일 콩나물국만 끓여 주면서도 제 속옷 하나만큼은 겁나게 비싼 프랑스제라며 새로 산 졸디오 아르마니 린넨 블라우스 자락을 치켜 보여 주는 요사스런 여자도 다 있다고 스스럼없이 남 흉허물 들추었지만, 순수하고 솔직한 성품에 밉게 보이지 않는 여인이라 무관하게 지내는 처지이다.
산촌생활에서 가장 한가로운 때는 겨울이 깊을 대로 깊은 정·이월이다. 그 중에서도 겨우살이 준비 다 끝나고 봄 준비 아직 이른 2월의 끝자락은 매화꽃이 핀다 해도 서두를 일이 없는 한가한 절기다.
이때쯤이면 매화꽃을 바라보면서도 황토방에 불을 넣고 응접실에는 1970년대나 볼 수 있었던 연탄난로까지 피워서 밤(栗)이며 고구마를 구워 지난 가을에 담가 두었던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고 마신다.
아직도 산자락, 밭자락에는 눈이 쌓여 있지만, 읍내 나들이 길은 눈이 내릴 때마다 밀고 쓸어서 자동차는 다닐 만하다. 찌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아랫마을 윤희 할머니의 목소리다. 손자 녀석이 감기에 걸렸다며 병원에 다녀와야 한다고 자동차 좀 보내달란다. 아내가 손 털고 부리나케 일어나 차를 몰고 달려간다. 텃세하느라 뒷간에 앉아 개 부르듯 하지만 허물없이 찾아주고 불러주는 고마움에 오히려 반가워서 달려가는 아내다.
한여름이면 산밭에 나와 일하고 돌아가는 이웃사람들을 자동차로 실어다 주기 예사였고, 시원한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야 했다. 그런 아내를 두고 마을사람들은 “서울사람이라고 다 깍쟁이는 아니네유우.”라고 했다.
올해도 우리들이 가꿔온 그 산촌엔 매화꽃이 어김없이 피어 있을 게다. 하얗게 핀 매화꽃 그늘 아래서 우리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함께 도란도란 말소리 이어 왔던 곳. 아내는 아련한 향수 같은 추억을 반추(反芻)하는지 병실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녀의 눈망울엔 작년처럼 매화의 꽃그늘이 가득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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