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이 바꿨습니다.
여름 내내 괴롭혔던 칙칙하고 끈적끈적한 공기가 아닌
습기가 가신 뽀송뽀송한 바람입니다.
피부에 와 감기는 느낌도 상쾌합니다.
8월의 마지막 주말 다락골엔
가을이 통째로 밀려들었습니다.
옥잠화 꽃이 스러지고 울금과 야콘이 소담스레 꽃을 피우며 바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원두막에 갇혀 궁싯거립니다.
아름다운 사연과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벗 삼아 일상의 거품을 걷어내려 해도
쉽게 착잡한 기운이 가시질 않습니다.
새벽부터 일기가 고르지 못하더니 비가 반나절이 다가도록 그칠 줄을 모릅니다.
차라리 세차게 퍼 부었으면
계획했던 일들을 포기하고 일찍 짐이라도 꾸릴 텐데, 가는 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몇 시간째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습니다.
"비가 와서 밭고랑에 들어가지 못 할 텐데.......
이거나 들고 가서 껍질 벗겨 말려봐유!"
비가 그치면 쪽파를 이식할 요량으로
종구를 손질하다 말고 동네소식도 들을 겸 건너간 이웃집에서
벗기다 남은 것이라며 토란대를 한 움큼 들려줍니다.
가지런히 썰어서 일부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서 껍질을 제거하고, 일부는 그대로 껍질을 벗겨냅니다.
미끈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줄기에서 묻어나옵니다.
길이방향으로 두툼하게 조각을 내
임시로 만든 엉성한 건조장에 서로 겹치지 않게 펼칩니다.
밉살스런 벌레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한랭사를 씌워둔 배추밭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이식을 마친 300여포기중 서너 포기는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해 말라죽고
나머진 얼추 자리를 잡았습니다.
밭에 옮겨 심은 후 뙤약볕에 축 늘어진 배추잎사귀만 눈앞에 아른거려
생사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지난 한주동안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잘 키워야한다는 강박증에 내몰리듯 시달렸습니다.
땅냄새를 맡고 잎사귀가 주먹만 해진 배추들이 나무랄 데 없이 예쁩니다.
코끝이 싸해지는 정체를 알 수없는 시원함이 온몸에 퍼집니다.
2주전에 씨를 뿌렸던 배무채(무+배추)와 무의 새싹은
지금까진 비슷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배무채싹이 무싹보다 잎사귀의 길이는 더 짧아 보이고 폭은 넓은 모습입니다.
조심스레 한랭사를 벗겨내고 금세 훌쩍 커버린
잡초들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끌어내 제거하고 무밭엔 한 포기씩만 남기고
솎아내기를 마쳤습니다.
호미로 흙을 북북 긁어 북주기를 해야 하는데
내린 비 탓에 호미에 흙이 달라붙어 일이 더딥니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저녁나절 새참시간이 다가왔는데도 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가
부글부글 속을 끓게 합니다.
자신만의 휴식을 누리겠다며 다락골 오는 길을 마다해버린
옆지기가 야속하기도 합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 고추밭에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따는 색다른 경험을 추가합니다.
쉼 없이 내리는 비와
잎사귀가 머금은 빗물까지
한껏 뒤집어썼습니다.
붉게 물든 홍고추만을 대상으로
조금이라도 푸른 기가 있을까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고
손으로 매만져 부드럽게 숨이 죽은 고추들만 골라 바구니를 채웁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일이였습니다.
올 고추농사 중 가장 많은 고추를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보다 쓸쓸함이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많았던 하루였습니다.
배추밭에 물주기 수고는 덜었습니다만 밭뙈기를 가득 채운 작물들은
아직도 강한 햇볕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얄궂기만 한 가을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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