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월 8월 6일 블로그 누적 방문객이 20만을 넘어섰다.
그동안 "다락골 사랑을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년전 그러니까 2005년 5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주야가 바뀌는 근무형태 속에서 적응을 잘못해 직장생활에 염증을 내던 옆지기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진다. 퇴근 후나 휴일엔 피곤에 쩌들어 늘 지쳐 쓰러져 잠자기 바쁜 사람 이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집을 비우는 횟수가 늘었다. 친구들과 꽃놀이 간다.동창회가 있다. 둘러대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6월초부턴 외출하고 돌아오면 내 눈치부터 살핀다.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감이 잡힌다.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평상심을 갖으려 노력했다. 6월 20일경 일요일 이였다. 늦으막히 일어나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데 아침 먹걸이를 준비하던 옆지기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무언가 결심에 차있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우둑 커니 창가를 주시하던 그녀가 불쑥 한마디 내 뱉는다.
"나 없이 살 수 있어"
"아니, 이 사람이 아침부터 무슨 말장난이야."
긴장되는 모습을 애써 감추며 버럭 소리쳤다. 일순 무거운 적막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흥분하지 말자", "흥분하지 말자" 자기체면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애쓴다.
"할애기 있으면 한번 해 보시지"
서슬 퍼런 감정 섞인 목소리로 내 뱉는다.
"솔이 아빠! 내가 당신한테 시집와서 하루도 안 쉬고 고생했잖아."
그건 그렇다. 백화점에서 근무하며 잘 나가던 여자를 철 바뀔 때마다 옷 사주고 맛있는걸 많이 사주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꼬드겨 5살 차이의 나이를 극복 하고 꽃보다 예쁜 나이에 나를 따라왔던 사람이었다.생활력 강한 친정어머님 밑에서 자라. 결혼하고도 이일저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 왔다.
"뭔데 그래, 당신 행동 영 못 마땅하네.많이 어색해 보여,무슨 일 있어?"
언니 따라 당진에 놀러갔다했다. 그곳에서 땅을 하나 샀다했다. 벌써 계약금까지 치렀다 했다.
언니가 전에부터 알고 계시던 농협소장님이 소개 해줘 보기도 좋고 욕심이나고해서 샀다했다.
산자락에 위치한 농가주택이 딸린 조그마한 밭이라 했다.
뒷동산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가 있다 했다.
집 앞은 뚝 터져 막힘이 없고 논으로 펼 쳐져 있다고 했다.
말없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자 언제 그러했냐는 듯 설명하기에 신명이 나있다.
나만 모르고 친정식구들은 다 알고 있다 했다.
인천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처제 내외도 잘 알고 있다 했다. 동서가 동행하여 몇 번 그곳을 방문했다고 말한다.
"나만 모른다고," 배신감이 밀려 왔다.절제하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당신이 복부인이야. 그곳에서 뭘 하려고 그래?
이 아줌마가 미쳤어 겁도 없이, 당신이 농사를 지을 줄 알아. 당장 물려 빨리!"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질럿지만 한편으로 안심이 된다.
도시에서 벗어나 살아본적이 없이 오직 도시에서만 살아오다 나와 맺어져서 결혼 후 계속 인천에서만 삶을 일구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씩 그것도 아버님 기일 아니면 명절 등 특별한 날에나 머나먼 남쪽 끝 보배 섬에서 팔순의 시어머니가 가꾸어 놓은 곡물이며 채소들의 신비감에 사로 잡혀 마냥 좋아하는 호미한 번 잡아보지 않은 전형적인 도시 아줌마가 사고를 친 것이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물려받은 DNA때문에 화초 가꾸기가 즐거워 아파트 베란다 빼곡히 화초를 가꾸는 내가 좋아 할 것 같아 노후를 생각해서 구입했다 둘러 댄다.
농사!
솔직히 나는 농사에 자신이 없다. 아니 싫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시골에서 낳고 자랐지만 농사에 대한 좋은 감정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늘 지쳐계시던 얼굴. 바람 많이 분다고 걱정. 비가 많이 온다고 근심. 비가 오지 않는다. 애태움, 하루하루 마음편이 쉴 수 없는 여유…….
"농사는 우리 대에서 끝낼 테니 너희들은 절대 농촌에선 살 지마라."
틈만 나면 입버릇처럼 소망했다. 자신들의 평생 직업 농사에 대한 부정적 사고는 자신들의 삶이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노력한 만큼 보상 받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워 그리하셨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 선뜻 자신들의 가업을 쉽게 자식들에게 물려주기가 싫었던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동화되어 살아간다 했던가! 농사의 깊은 뜻은 잘 모르지만 철모르는 마나님께 “너희가 농사를 알아” 반문하고 싶었다.
제발 해약해라 설득하고 강요하고 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한번 결정한 내용을 원상 복귀시키려 들지 않는다. 자기가 시집와서 맨손으로 벌어드린 것만으로도 그걸 구입하려 들면 충분하다며 자기가 결정한 일이니 묵묵히 따라 와달라 집요하게 고집을 부린다. 평소에 서방 말이라면 싫든 좋든 내색 한번 안하고 잘 따라주던 사람이라 한편으론 당황스럽고 또 한편으론 어이없기까지 하였다.밭뙈기의 규모가 얼마인지, 얼마주고 샀는지, 대금마련은 어떻게 할 것인지,하나도 관심 없는 척하고 "당신이 무턱대고 저질은 일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결하라" 강요하니 "자기혼자 좋아서 산 것도 아닌데 그것도 이해 못 해주냐, 당신하고 살기 싫다. 애들은 당신이 맡고 해어지자. 위자료 빨리 내놓아라. 그 돈으로 잔금 치루겠다"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앞세우며 자신의 결정에서 한 발짝 후퇴할 기미를 전혀 보이질 않고......
나를 향하는 옆지기의 주절대는 잔소린 시간이 갈수록 더 거칠어 졌다.
행정신도시다, 미군기지이전이다, 서해안권 개발특수다. 개발호재로 눈먼 분들의 투기행렬은 줄을 서고 여기저기서 부동산 광풍에 휘청거리던 시기였다. 그 곳 당진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어 7월1일부턴 모든 토지거래가 묶인다며 그 이전에 등기이전까지 마쳐야 한다고 땅을 소개한 분의 애타는 목소리는 처음엔 옆지기 휴대전화로만 울려 퍼지더니 6월말이 가까워서는 집전화까지 부산을 떤다.
설득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말 한마디만 옮기려고 해도 불같이 화를 냈다.
빨리 이혼하자 징징 댔다.어느 순간부턴가는 자기가 행한 일에 체념을 했는지 오직 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고생 그만 시키자. 혼자 잘 먹고 살자 한 것도 아닌데.......조금은 괘씸했지만 마음을 접기로 했다. 계약금도 아깝고 해서…….
결정하니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되었다.
7월 첫째 주 일요일 우편으로 보내온 등기문서를 손에 쥐고 당진으로 갔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니 인천에서 그 곳까진 한 시간 남짓 거리상으론 약 100km.
충남 당진군 당진읍 대덕1리 198-208.속칭 "다락골"로 불러지는 마을이 그 곳에 있었다.
"은행나무집 땅 산 인천사람들인가 봐여."
"인천에서 어떻게 농살 짓겠다고, 돈 자랑하려구 잡아 놓았나보구먼 ."
"외지 것들이 들어오면 동내 다 버리는데 ……."
"이제 그 밭 금방 산 되겠구먼, 농사 제대로 하겠어."
...........
흘러지나가는 수군거림을 외면했다.
잎사귀를 다 따버린 담배나무만 앙상히 서 있고, 붉게 익어가는 고추들이 옛 기억을 회상하게 했다. 어색한 모습으로 밭을 한 번 빙 둘러보고 산자락과 밭의 경계지점에 조립식 판넬로 지어진 주택에 들어서니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서 낯선 손님을 바라보고 어리둥절 하신다. 땅을 계약하면서 서로 안면이 있을 탠데......
느낌이 안 좋았다. 허겁지겁 집안을 대충 둘러보고 쫓기듯 집을 빠져나와 옆지기에게 따져물으니 자기도 주인은 오늘 처음 대면한다 하며 모든 계약은 소개시켜준 분에게 위임하여 처리했다 한다.
"직접 계약서를 작성 안 했다고……."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어다는 느낌이 언뜻 스쳤다. 나도 그랬다. 서류를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야 했었는데 옆지기와 오랜 실랑이 속에서 고집만 부리며 시간만 허비하다 마감시간이다 되고서야 서두르는 양 촉박한 일정 속에서 우편으로 보내준 등기부등본과 도시계획확인원만 겨우 확인하고 선뜻 잔금을 송금했었다.
예상대로 일은 꼬여들었다.
칠순의 고령에 농사일하기가 힘에 부친다고 이곳 터를 정리하고 당진읍에 2층 단독주택을 마련했다는 분들이 겨울이 다가와도 집을 비워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집은 밭과 산자락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등기부상에 나타나지 않는 집이였다. 건평이 대략 30여 평인 조립식으로 지어진 주택이었다.
옆지기는 땅값에 집값을 더해서 값을 치렀다하고, 그분들은 밭만 팔았지 집은 애기도 없었다며 집이 필요하며 집값을 더 달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매매하겠다고 생트집을 잡는다.
"내가 인천에서 웃돈까지 올려주며 이 따위 밭뙈기만 보고 땅을 잡았겠냐, 주말에 쉬어갈 집이 있어 잡았다고 목이 쉬게 주장했지만 그 분들 앞에선 공허한 메아리로만 다가서는 것 같았다.
사건의 처음과 끝은 이랬다.
부동산 거래에 있어 제반 사항을 확인하고 주인과 직접 계약서를 작성했어야 함에도 우리는 소개시켜준 분의 말만 믿었고, 소개 시켜주신 분은 집주인이 서로 이웃에 사는 먼 일가친척이여서 서로 좋은 것이 좋다고 밭만 팔면 응당 집도 따라갈 것 아니냐면서 안이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그래서 집에 대한 내용은 두 분이 작성한 계약서에도 빠져있었지만 집값이다하고 웃돈을 더 쳐 드린 건 서로들 인정하고 있었다.한푼이라도 더 받아내고픈 욕심때문이였다.
"돈 앞에서 처자식도 없다 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계약을 그따위로 했다면 나의 옆지기에 대한 추궁은 계속 되고 일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괜히 일 저질러 이혼까지 하겠되었다고 이쪽저쪽에 통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조용히 해결되길 기대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들려오고 상황은 계속 꼬여만 갔다.지적공사에 의뢰해 측량을마쳤다.내 땅에 지어진 집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굴삭기로 철거하겠다고 시한을 정해 통보하고 옆으로는 소개시켜주신 분께 강요하여 요구하는 금액을 최소화시켜 일을 일달락지었다.
사소한 부주의에서 오는 결과는 그 대가를 요구 했다.
지난 시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금이지 옥인지 아끼며 길러주신 분들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들이 하시는 일은 그분들만의 일 인양 게으름만 때우며 흙냄새만 맡고 자란 나였다. 해 뜨며 논밭에 나가고 해가 지면 들어오는 연속된 일과 속에서도 궂은일 하나 시키고 싶지 않은 그분들의 욕심 속에서 농사일은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인 양 착각 속에서 살아오다 작년 봄 처음으로 다락골에 감자를 심었다. 몸속에 내제하며 살아 움직이는 농사꾼의 유전자로 인해 옆지기의 예상치 못한 돌출행동으로 마련된 터전위에 씨를 뿌렸다.
집안에서 먹다 남은 푸릇푸릇 싹이 난 것, 이집 저집에서 조금씩 동냥한 것과 시장바닥에서 부족한건 구입하여 어렸을 때 기억을 끄집어내 씨감자를 칼로 절단하고 절단면을 소독한답시고 나뭇잎태운 재를 묻혀 심었다. 동네 분을 고용하여 관리기라는 것으로 땅을 파고 우리 내외와 처재내외가 합세하여 갈아 엎어놓은 땅에 한사람은 앞장서서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한사람은 그 구멍에 복합비료를 한 줌씩 집어넣고 그 다음 사람은 씨감자를 하나씩 집어넣고 마지막 사람은 흙을 채워 마무리 한 다음 하얀 비닐로 이랑을 씌웠다.
직접 키워 수확한 감자를 쪄서 먹을 생각에 모두 신이 났었다.
강원도에서 부친께서 감자농사를 대량 재배한다는 회사동료의 조언을 대충 흘려듣고 처음 하는 농사에 정성을 다했다. 그렇게 대략 100여 평에 감자를 심었다. 2~3주가 지나면 그 곳에서 푸른 싹이 올라올 거라 했다.
그때 그 부위를 상처 안 나게 비닐만 살짝 찢어주고 흙으로 채워주라 했다.
3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가도 100여 평의 감자밭에선 애써 눈 씻고 찾아보아도 푸른 싹은 보이지 않았다. 25m가 족히 넘은 감자 골에 많으면 하나 아니면 두개 그 나머지 대부분은 텅빈 골, 감자 100여 평 심어 4그루 생존에 감자알 달랑8개 수확.
열무도 그랬다.
싱싱하게 자란 이웃집 밭의 열무가 보기가 좋았던지. 옆지기가 우리도 열무를 한번 심어보자 했다. 초기 생육상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수확기를 앞둔 주말에 방문하니 그게 채소밭인지 벌레사육장인지 …….우리는 또 다른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열무 잎사귀를 다 갉아먹어 버렸다.
고추도 심었다.
청양고추 50그루, 일반고추 150그루 기억을 더듬어 고추에서 발생하는 벌래와 탄저병예방에 고생하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그것들만 잘 관리하면 고추농사는 끝나는 줄 알았다. 장마는 시작되었고 여기저기서 고추나무가 시들어 갔다. 시들음 병엔 약도 없다는데 풋고추라도 따먹겠다는 욕심에 그냥 지나친 게 화근이 되었다. 여기저기 시들다 말라버려 볼썽사납게 변해버린 고추밭을 바라보며 형용할 수 없는 창피함을 감내해야만 했다.
5월 봄 가뭄에 씨앗 뿌린 참깨 밭은 종자들이 발아가 되지 않는 관계로 온 밭에 쇠비름의 천국으로 변해 버렸고 새때들의 줄기찬 공격에 콩 씨앗만도 3번을 파종해야만 했다.
거름시기를 잘못 맞추어 녹아내린 김장 배추 모종 때문에 2번의 모종을 이식해야만했고 한창 성장기의 무에 욕심을 너무 부려(너무 물을 많이 줌)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손상시켜 버렸다.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풀을 뽑았고 틈만 나면 작물들에게 물을 뿌렸다. 좋다는 비료는 다 사 날랐고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데로 비가 오지 않으면 오지 않은 데로 가슴앓이를 했다. 현지 주민들께 마치 점령군의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을까 숙고했고 생각해서 행동했다.
"다 때려치우고 시골 내려가 농사나 지을까." 이 말의 거짓됨을 쉽게 터득도했다.
2006년8월 초순 이였다.
아파트 동내 분들과 어울리는 친목계에서 "산청목"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컴퓨터를 검색하면 잘 알 수 있다 했다.
"검색"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전에는기껏해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끔 앉아 고스톱이나 치는 게 고작 이였다.
살아 숨 쉬는 좋은 정보들이 가득했다.또 다른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
주말에는 다락골에 가서 땀을 흘렸고 놀이감을 놓쳐버린 아들놈의 저항을 묵살하고 주중에는 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루가 멀다 달려가더 당구장도 발길을 끊었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줄이고 카페라는 곳에서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 불로그도 개설했다. 글도 써보고 스크랩도 해 오고 남의 자료도 주인 허락 없이 살짝 가져오기도 했다.
애써 올린 글 그냥 가져온 점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내가 블로그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서다.
이론과 실제는 어느 정도의 괴리가 발생한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여 철저히 대비하면 조그마한 시행착오라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어서다.